퇴근 인파가 몰리기 직전인 오후 5시 56분 강남구청역, 창민씨는 언제나처럼 1-1 문 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창민씨는 탄력근무제를 활용하여 남들보다 30분 일찍 출근하고 30분 일찍 퇴근했다. 그래야 지금 이 시간, 이 칸에서 그나마 덜 복잡하게 퇴근을 할 수 있었다.
곧 지하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창민씨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서서 늘 그랬듯이 열차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그럼 그렇지. 창민씨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스마트폰을 꺼내 웹소설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창민씨에게는 첫사랑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때 만난 유정이라는 아이였다. 유정이는 예쁘고 똑똑했다. 빠른 년생으로 학교에 입학해서 다른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창민씨를 동생처럼 늘 챙겨주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을 때는 가방에서 밴드와 연고를 꺼내 응급처치를 해주고 양호실에 데려다주었던 기억도 있었다. 유정이의 손은 참 따뜻했었다.
두 사람은 6학년이 되면서 서로 다른 반이 되었다.
그때 친구들은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좋아하는 사람이 바뀌었지만, 창민씨는 그렇지 않았다. 옆옆반인 유정이를 보기 위해 일부러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를 찾아가서 아는 척을 했다. 그때마다 유정이는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오~ 김창민! 키 많이 컸는데?”
초등학교 졸업식날. 창민씨는 밤 새 쓴 편지를 주머니에서 넣었다 뺐다 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오늘이 아니면 줄 수 없다. 이 편지도 내 마음도. 하지만 유정이는 함께 온 가족들이 많았고 용기가 없었던 창민씨는 유정이에게 편지를 줄 수 없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마음에 너무 슬펐지만, 창민씨에게는 용기가 없었다. 그저 유정이의 뒤쪽에서 어슬렁거리며 유정이가 가족들과 찍는 사진에 자신이 나오길, 그래서 유정이가 자신을 기억해 주길. 창민씨는 그저 바랄 뿐이었다.
반 소식통인 윤서가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야, 강유정! 너 이사 간다며?”
“어, 수원으로 가. 중학교도 거기서 다닐 거야.”
서울 토박이인 창민씨는 수원이 어디인지 몰랐다. 하지만 가슴에 새겨두었다. 수원.
시간이 흘러 창민씨는 어른이 되었다.
왜인지 기억은 하지 못했지만 ‘수원’이라는 지명이 좋아서 수원시 행궁동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 강남구청역으로 출퇴근을 했다.
늘 똑같은 출근과 퇴근. 그렇게 창민씨는 하루하루를 쌓아갔다.
남들 다 하는 연애, 소개팅 한 번 하지 않았다.
사실 창민씨가 다른 사람을 일부러 만나지 않은 건지, 만나지 못한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도 가끔 창민씨는 이제는 희미해진 유정이를 생각했고, 안부가 궁금했다.
어떤 모습의 어른이 되어 있을까 상상했다.
그리고 자신처럼 아직 결혼을 안 하고 있었으면 하고 바라며 피식 웃기도 했다.
영화처럼 언젠가 우연히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할까를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창민씨는 유정이를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아니, 알아보지 못했다.
선릉역 1-1 플랫폼에서 저녁 5시 59분에 지하철을 타고 수원으로 퇴근하는 유정이를.
오늘도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등을 맞대고 서 있었다.
이렇게 이 칸에서 두 사람이 함께 만난 건 오늘이 벌써 열네 번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