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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에튀드(Étude)

by 보싸







지하철은 여느 때처럼 붐볐다.

재희는 무거운 가방을 둘러메고 흔들리는 차 안에서 중심을 잡았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가 살짝 흐트러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커다란 헤드폰을 눌러쓰고 음악을 들으며, 조용히 하루를 견디는 중이었다.


가방이 묵직했다. 교과서와 필기구, 문제집, 집중력을 높여준다며 엄마가 굳이 밀어 넣은 이름 모를 차가 담긴 보온병까지. 하지만 재희에게 더 무거운 것은 가방 속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루의 무게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시험과 과제, 부모님의 기대,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오는 외로움. 재희는 이 모든 것을 등에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새벽까지 공부를 했다. 수학 문제를 풀다가 지쳐서 노트 위에 엎드렸던 기억이 난다. 오늘 아침은 평소보다 더 힘들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부랴부랴 옷을 입고 나왔고, 아침을 먹을 틈도 없이 집을 나섰다. 엄마는 대충 인사만 건넸고, 아빠는 이미 출근한 뒤였다. 가끔은 집이 호텔처럼 느껴졌다. 각자의 방에서 나오지 않으면 서로 얼굴을 볼 일도 거의 없었다. 어쩌면, 얼굴을 보지 않는 게 더 편한 것인지도 몰랐다.


학교에서도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수업마다 밀려오는 과제, 끝없는 시험 일정. 늘 같은 자리에 앉지만, 가끔은 그 자리에서도 어딘가 떠 있는 기분이었다. 친구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멀게만 들렸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꼭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어깨를 들어 가방을 고쳐매었다. 허리춤까지 내려온 가방이 불편했지만, 익숙한 무게였다. 재희는 스마트폰을 들어 음악을 바꿨다. 조금 더 신나는 곡을 틀었다. 적어도 음악만큼은 한없이 가볍고 싶었다.

지하철이 어느 역에 멈췄고, 재희는 바닥을 꿋꿋이 딛고 문 앞으로 걸어 나갔다. 문이 열리는 순간, 한 번 더 가방을 매만졌다. 마치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는 듯한 동작이었다.


역 밖으로 이어진 긴 계단 끝으로 햇살이 희미했다. 햇살이 묻은 재희의 얼굴은 피곤한 눈빛이었지만, 그 안에는 희미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지금은 엄마의 꿈이지만, 스스로의 꿈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다짐한다.


가방은 여전히 무거웠다. 하지만 재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대치역을 지나며


*에튀드(Étude): 프랑스어로 공부 또는 연습을 의미하며, 특히 음악에서 ‘연습곡(練習曲, Study Piece)’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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