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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싸 Dec 09. 2019

직업

"요즘은 무슨 일 해?"


오랫만에 누군가를 만나면 꼭 듣는 말이다.

그 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본격적으로 디자이너라는 직종을 선택해서 길을 걸어 온 이후에도 나의 직업은 수시로 바뀌었다. 자영업자에서 제빵사를 거쳐 회사원을 찍고, 인테리어 현장소장을 빙자한 건설노동자에서 다시 회사원으로. 문장은 한문장이지만 저 문장 안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땀과 눈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를것이다. 굳이 남의 개인사 알 필요 있나. 그냥 그랬다는 것이다.


저 위에 열거한 직업 변천사 중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없다. 그렇다면 나는 그동안 디자인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나는 매 직업마다 디자인을 했고 디자이너로 살아왔다. 단지 그때 그때 돈을 벌며 먹고 사는 '직업'이 상황에 따라 달라졌을 뿐이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그게 바로 지금부터 할 소리다.


사람이 어느 곳에 속해 있고 어떤 일을 하는가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표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간단한 판단기준이 된다. 내가 빵집에서 빵을 만들고 있으면 사람들은 나를 제빵사라고 하고, 디자인 회사에서 디자인을 하고 있으면 디자이너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인식은 정확하면서도 정확하지 않다. 가슴 속에 디자인에 대한 열정과 꿈이 가득 담긴 보석을 품고 있지만, 그 보석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만나지 못해서 다른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또 반대로, 회사에서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매일 수십개의 디자인 시안을 붕어빵 찍어내듯이 만들어내면서 디자이너라는 스스로의 직함에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보석.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가치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나는 20년 가까운 시간을 '디자이너'로 살아왔다.

항상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이걸 어떻게 만들었을지 궁금해하고, 디자이너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쓰는 글을 읽고, 계속 자잘자잘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면서, 나는 그렇게 디자이너로 살아왔다. 그러나 한때는 디자인이 너무 싫었다. 클라이언트들이 더이상 나를 찾지 않을때, 시장에 내놓은 상품들이 기대만큼 팔리지 않을때,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나쁜 평가를 받을때... 그런 일들이 쌓여 한없이 나를 작게 만들었다. 실력이 없다고 생각했고, 스스로 만든 열등감 속에서 디자인을 철저하게 외면하며 살았던 시간들이 있다. 다시는 디자인을 하지 않겠노라고 스스로 선언하고, 디자인과는 전혀 다른 일을 찾았던 시간들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나는 다시 디자이너로 살고 있다.


디자이너는 콘텐츠를 완성하는 사람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완성으로 보이게 만드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사람은 시를 쓴다. 그런데 디자이너는 그림으로 엽서를 만들어 인쇄를 하고, 시로 타이포그라피 포스터를 만들고, 그것들을 모아서 책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콘텐츠가 손으로 만져지는 무언가로 완성되는 것. 그것이 디자인이고 디자이너가 가진 힘이다.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은 그 손맛을 잊지 못한다.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직장생활로 찾아온 번아웃 속에서 지쳐있더라도, 디자이너는 그 손맛을 잊지 못하기에 다시 꾸물꾸물 뭔가를 보고, 참견하고, 만들어낸다. 내가 그랬다. 그 손맛을 잊지 못했고, 완전하게 떠나지 못했다. 제빵 책을 보면 타이포그라피가 눈에 거슬렸고, 인테리어 현장에서는 페인트를 칠하며 팬톤 칼라코드를 생각하고 있었다. 서 있던 그곳이 싫어서 앞으로 최대한 멀리 도망쳤더니 한바퀴 돌아 다시 그 자리에 서게 된 기분이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힘. 그 특별함.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그 특별함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야기해 준다.

지금 당장은 비록 이런 저런 삶에 쫓겨 정신없이 살고 있지만, 가슴 속의 보석을 가끔씩은 기억해보도록 하자.       


자신의 정체성은 밖으로 보여지는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로만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직업은 그냥 직업일 뿐, 퇴근 후에, 생계에 대한 의무의 시간을 마치고 오롯이 자신을 위한 시간이 주어졌을때, 그 때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가로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결정된다.


삶에 치이고 생계에 쫓기고 육아에 눌려 가슴 속 한구석에 쳐박아둔 보석을 다시 꺼내서 잘 살펴보자.

자신도 모르는 새에 다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냥주제만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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