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들에서 연을 맺고 지금껏 연락을 주고받는 고마운 녀석들이 있다.
가끔씩 카톡을 건내며 현재 사는 이야기, 회사 이야기 등을 나누곤 하는데 공통적으로 지금 회사에서 만족하면서 잘 다닌다는 녀석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이 녀석의 회사에 대한 불만이 저녀석의 회사에서는 장점이 되고, 저녀석의 경우에는 그 반대가 되는 상황이 종종 있다. 내가 능력만 된다면 회사를 바꿔주고 싶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고생 덜하면서 불평하는 녀석을 고생 더 하는 회사로 보내 체험학습을 시켜주고 싶기도 하다.
모두가 그렇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스스로 100% 만족하는 회사에 다니기는 정말 어렵다.
나역시도 길고 긴 직업의 유랑생활 끝에 지금의 회사에 정착했는데, 안정적이고 워라벨 확실하고 복지도 빠지지 않는, 조건으로는 왠만해선 어디에 모자라지 않는 회사다. 이 회사에서의 입사 제의는 수년 전부터 있어 왔다. 오래전에 회사 로고를 만들어 준 인연으로 가끔 외주 알바를 해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제안이 있었고, 나는 번번이 거절을 해왔다. 이곳에서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이곳에 오면 디자이너로서의 생명이 끝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동안 이 회사는 엄청나게 성장을 했고, 간사하고 궁하기 짝이 없던 나는 그동안 높아진 연봉제안을 못이기는 척 덥썩 물고 이곳에 앉아 있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불리우고 실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전권을 갖고 있지만, 한정된 클라이언트와 그들의 니즈 속에서 디자이너로서의 욕구를 누르고 부끄러운 디자인을 해야한다는 엄청난 괴로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 싶겠지만, 디자이너라면 너무 절절히 와닿는 고민이지 않을까... 내가 작업하는 것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회사를 통해 나가서 업계 표준이 된 제품들이라, 고객들은 디자인의 변화를 낯설어하고 불편해한다. "뭔가 더 멋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기존에 있던 것들과 똑같아야 하니, 기존대로 해주세요..." 내가 이곳에 와서 클라이언트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다. 정말 눈물이 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전임자가 만들어 둔 기존의 시안과, 새로 멋지게 바꿔준 시안 두가지를 보내면 이곳의 클라이언트들은 100퍼센트 기존의 시안을 선택한다. 물론 새로운 제품이 나올때는 내 마음대로 디자인을 하고 클라이언트의 만족도도 높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일부일 뿐, 기존제품 재탕과 신제품 출시의 비율은 대략 9:1 정도 된다. 이 숨막히는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기존제품이 나갈때 엉망이던 타이포그라피를 조금 손 본다던지, CMYK값을 보기 좋게 아주 조금 바꾼다던지, 찌그러진 백터라인을 다듬는다던지, 다음에 같은 작업을 좀 더 손 쉽게 할 수 있게 템플릿을 만든다던지... 이런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변화를 조금씩 주고 있을 뿐이다. 자, 이런 일을 하는 나는 과연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을까?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디자이너들은 생각보다 많다. "내가 디자이너인지 일러하는 기계인지 모르겠어", "내가 뭐 디자이넌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지", "아..진짜 디자인을 하고 싶다..." ... 등등의 말은 디자인을 하는 지인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직업을 디자이너라고 말하면서도 뭔가 개운치 않은 찜찜한 기분을 마음 한켠에 쌓아두고 살아왔다. 그래서 한번은 "우리, 이제부터 디자이너라고 하지 말고 '어도비 오퍼레이터'라고 할까?"라고 슬픈 제안을 한적도 있다. 그 제안은 "난 파워포인트만 해요..."라는, 모 대기업에서 디자이너로 재직중인 한 녀석의 푸념으로 사그러들긴 했지만...
디자이너는 무엇일까?
우리는 학교에서 디자인을 공부할때부터 이 질문을 마주해왔다. '디자이너란 무엇인가','영혼을 잃지 않는 디자이너','디자인 생각'... 뭐 이런 디자이너의 자세와 철학에 대한 이야기들을 수도 없이 탐독하고 밤을 새우며 떠들곤 했던 진정한 디자이너의 모습.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디자이너의 이상'에 대해서 현실의 자신을 계속 비추어보며 스스로 열등감 속에서 빠져 '실패한 디자이너'로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오래전에 디자인 매거진 지콜론에서 원로 디자이너 이상철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선생님은 일흔이 넘어서도 현역 디자이너로 활동하시면서 디자이너의 '익명성'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계시다는 이야기였다. 요즘의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드러나고 빛나기를 바라지만, '사회의 심부름꾼'으로서의 디자이너의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돌아보면 디자이너로서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나의 시간들이 그랬다. 디자이너로서의 '나', '내'디자인... 내가 너무 인정받고 싶었고, 내가 너무 드러나고 싶었던 시간들. 그렇기에 나는 항상 부족했고 모자랐고 형편없는 디자이너로 남을 수 밖에 없었고 스스로를 '실패한 디자이너'로 낙인찍고 살아왔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조금 더 빨리 이해했었더라면 달랐을까? 아니, 지금 이 글을 혹 읽고있을 누군가처럼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후루룩 넘어갔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선생님도 많은 시간 디자이너로서 풍파를 겪으며 하나씩 하나씩 체득하게 된 이야기가 아닐까. 지금 내가 나름의 풍파를 겪으며 아주 조금 그 말씀을 이해하게 된 것처럼.
디자이너는 예술가가 아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디자이너는 사회의 심부름꾼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가 아니라, 의뢰한 클라이언트의 바램을 눈에 보이는 모양으로 만들어주는 심부름꾼이 되어야한다. 훌륭한 요리사의 목적이 무엇일까? 멋지고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것이 요리사의 목적이 아니다. 요리사의 목적은 그 요리를 먹는이를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까지 나아가야 완성된다. 요리를 만들어 내는 과정은 충분히 멋지고 경이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오롯이 먹는 이를 향해야 한다. 디자이너라고 다르지 않다. 디자이너의 작업물이 너무 멋지고 훌륭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디자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린다면 그것은 좋은 디자인이 아니다. 디자이너로서의 나의 능력을 뽐내는 것이 아닌, 클라이언트가 기분좋게 받을 수 있는 디자인. 그것이 좋은 디자인이고, '심부름꾼'으로서의 디자이너의 역할을 잘 수행한 것이다. 나를 위한 디자인을 실컷 해놓고 클라이언트를 계몽하려고 하는 것은 디자이너로서 좋은 자세가 아니다. 괜히 서로 감정만 상하기 쉽상이다. 무언가 아쉬운 것, 해소하고 싶은 것은 퇴근 후에 '예술을 하는 디자이너'로서 '나'를 위해 하면 된다.
실패한 디자이너는 없다.
열등감에 갇힐 필요도 없고, 직장에서 제대로 된 디자인을 못한다며 좌절할 필요도 없다.
직장에서의 디자이너의 역할과, 퇴근 후의 디자이너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을 뿐이다.
직장에선 열심히, 기쁘고 겸손하게 직장일을 하고, 그동안 쌓인 아쉬움과 갈증은 퇴근후에 스스로를 위한 디자인으로 풀어보자. 그런것들이 쌓여 디자이너로서 당신을 성장시킬 것이다.
#그냥주제만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