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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싸 Jun 30. 2020

Futura

간밤에 꿈을 꿨다.


어딘가 번듯한 사무실에서 커리어우먼으로 보이는 여성과  브랜딩에 관련한 미팅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진행했던 로고들을 보여주며 이건 어떤 서체를 베이스로 어떻게 만들었고, 어쩌고 저쩌고 하며 재수없는 자랑질을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내가 이야기하던 서체명들을 재차 확인하던 그녀가 갑자기 내가 보유한 서체들의 라이센스 소유 여부를 물었다. 평소 서체와 소프트웨어의 라이센스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라, 자신있게 그간 수집했던 라이센스들을 보여주려고 ‘구입폰트’라는 폴더를 뒤졌는데 이게 왠걸, 라이센스 관련된 자료는 하나도 나오지 않고 내가 구입한 적 없는 불법 다운로드한 폰트들만 하드 안에 가득가득 쌓여있었다. 당황한 표정을 감추며 잠시만요..를 연발하던 내게 그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됐고요, 그러니까 아까 보여주신 CI에 ‘*유니버스(Univers)’를 쓰셨다는거죠? 라이센스는 없으시고요?”

“네...유니버스.....인데, 이게 라이센스가.....”

내 옹색한 변명 따위는 필요없다는 듯 경쾌하게 일어난 그녀는 사무실 밖으로 휙 나가버렸고, 나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를 중얼거리며 유니버스 서체를 내가 샀었나 안샀었나, 로고로 사용되면 라이센스 기준이 다를텐데…. 따위를 생각하다가 잠에서 깼다. 


다행히도 현실의 나는 유니버스는 커녕 그 어떤 상업용 서체를 사용해서 브랜딩 작업을 한 적이 없다. 

그래, 사실 브랜딩 작업을(다른 작업들에 비해) 별로 한적이 없다. 끽해야 캘리로 휘갈겨 만들거나 벡터라인으로 한획씩 그리거나 해서 라이센스 위반의 건덕지를 피해서 만든 로고들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요즘에 사용하는 클라우드 폰트 서비스는, 유료로 이용하는 동안은 로고제작에 폰트를 사용해도 괜찮은 무적 라이센스의 권한까지 주니 라이센스의 대한 걱정을 별로 할 필요는 없어졌다. (물론 이 말은 그 브랜드가 살아있는 한 평생 그들의 폰트서비스를 유료로 이용해야 하는 참신한 족쇄를 새로 채운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든 저렇든, 산돌은 완성도 있는 영문서체를 어서 많이 공급하라!!)


오늘은 그런 꿈을 꾼 김에 ‘나의’ 폰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무언가를 수집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디자이너라면 한때 폰트 수집에 대단히 열을 올렸을것이다.  특히 학생일때는 폰트를 많이 가진 것이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인 냥 마구잡이로 폰트를 구해 하드 속에 꽉꽉 채워넣는다. 그리고 그 폰트들을 모두 시스템에 깔아, 폰트를 읽어내느라 점점 일러스트레이터가 늦게 열려도 왜 그런지도 모른채, 어휴 이놈의 똥컴퓨터..를 중얼거리며, 수백개의 폰트리스트를 오르내린다. 그래봤자 결국 실제로 쓰는 폰트는 채 열개도 되지 않으면서 괜히 부자가 된 느낌에 우쭐해지고 마는 것이다. 요즘은 폰트회사마다 폰트 클라우드 서비스를 시행하고, 학생용 라이센스도 있어서 요즘 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때는’ 그랬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로서, 학생 때는 학생이라 봐주는 것들이, 학생의 딱지를 떼고 나면 바로 냉혹한 현실 속에서 마치 도둑인냥 취급받는 일들이 종종 들려온다. 실제로 학생때 아르바이트로 작업한 일때문에 몇년이 지나 갑자기 폰트회사의 법률대리인으로 부터 공문을 받거나 전화를 받는 등의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다. 디자인을 가르치는 학교에서 간과하는 아주 중요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타이포그라피 교수님이 아주 좋은 서체라며 소개하고 공유해준 서체를 ‘교육적 목적’외에 자신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 사용한 학생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그로 인한 책임의 무게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교수님이 과연 얼마나 될까?   

폰트 라이센스에 대한 단속이 심해지고, 요즈음엔 온라인으로 떠도는 모든 PDF문서들을 수집해서 폰트를 문서에 탑재하여 배포한 건들을 찾아내고 그 문서 제작자를 찾아내어 라이센스 비용을 지불하라고 하는 사례들이 많아졌다. (물론 디자이너들이 고의로 폰트를 ‘탑재’했을 리는 없고, 인디자인이라는 편집용 프로그램으로 제작된 PDF문서는 대부분 ‘폰트가 적용된’ 텍스트가 살아있기 때문에 어떤 폰트를 사용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겪고 보고 들은 사례들을 보면, 학생이나 주니어 디자이너일때 뭘 몰라서 대놓고 사용했거나, 최종으로는 그 폰트를 쓰지 않았으나, 어딘가 자기도 모르게 그 폰트로 설정된 빈 텍스트 박스가 만들어져서 보이지 않아서 몰랐거나, 특수문자에 소량 쓰였거나 하는 등의 억울한 사례로 법률대리인의 공문을 받은 사례가 적지 않았다. 물론 완성된 파일을 PDF로 뽑아내기 전에 문서에 사용된 폰트를 찾아보고 체크해보면 되는데(아주쉽고 간단한 프로세스다), 마감치느라 바빠죽겠고, 이미 밤도 새서 눈이 빠지겠는데 그정도까지 꼼꼼히 챙길 정신이 없는 경우가 많다. 

내 경우엔 10년쯤 전에 작업한 책이 PDF 전자책으로 재 발행되었는데, 거기에 자신들의 폰트가 쓰였다고 하며, E-BOOK용 라이센스가 있어야 하니 제출하라고 하는 공문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당당하게 전화를 걸어, 나는 그 일을 인쇄용 책 작업으로 진행했고, 인쇄용으로 쓸 수 있는 해당폰트의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으며, E-BOOK으로 변환된 후의 일은 내가 알지 못하고, 그건 E-BOOK을 제작하는 업체에서 비 상용 폰트로 바꾸어야 하는 부분이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그 책의 E-BOOK작업을 했으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라이센스를 가진 폰트를 바꾸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의 요구대로 인쇄용 라이센스를 그들에게 제출했고, 다시는 그런 전화나 공문을 받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개인사업자를 내고 돈을 벌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ADOBE CS6 소프트웨어를 정품으로 구입했던 일이다. 당시 관/부가세 포함 거의 170만원을 주고 구입했는데,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폰트 회사들에서 폰트들을 하나씩 구입해서 ‘구입폰트’폴더를 채우는 일들이 참 큰 기쁨이고 보람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소프트웨어와 폰트 사용료는 회사에서 공과금처럼 매월 나가는 통에, 그런 소박한 기쁨과 보람은 사라졌지만, 외국 폰트 사이트에서 매주 날아오는 폰트 광고들을 보고있으면 아직 가슴이 설렐 때가 있다. 우와, 이거 겁나 예쁜데 60불밖에 안하네? 근데 이걸 어따 쓰지…하고 혼자 장바구니를 비웠다 채웠다…


어쨌든 너무 돌아왔는데, 그 꿈을 꾸고 난 후, 아내와 꿈 이야기를 하다가 합의를 본 것이 있다.

(이제야 이 글의 제목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아내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퓨츄라(Futura)라는 서체에 대해서 떠들고, 그 서체가 갖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와, 제작자인 ‘파울레너’ 선생님의 철학에 대해서 떠들고, 그 서체를 디지털 폰트로 만든 'Linotype’ 이라는 회사에 대해서 떠들고, 아내의 표정이 슬슬 짜증스러워질때쯤, 그러므로 내가 그 폰트를 구입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설파했다. 한때 훌륭한 제품디자이너이자 서비스 디자이너가 될뻔한 기회를 어떤 나쁜놈의 감언이설에 속아 뻥 차버리고 같이 죽도록 고생하다가 그놈의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있는 내 아내는 대체 그게 왜 필요하냐며 반문했고, 나는 비맞은 개마냥 풀이 죽어서 ‘그렇지…그런 것은 아무 쓸데가 없지…퓨츄라를 내가 가졌다고 해서 회사에서 써봤자, 이 영어 이거 이상한데요? 그냥 원래대로 해주세요…라는 말만 들을거야…퓨츄라는 나에게 과분한 폰트야…’ 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갖고싶은 것이 생기면 결국 갖거나, 지가 포기할때까지 누누히 떠들것을 너무 잘 아는 내 아내는 매월 2만원짜리 적금을 들것을 제안하며, 1년 후 적금 만기시 퓨츄라를 구입하라는 시한부 허락을 해주었다. 박봉에 생활하랴, 전세 대출금 이자내랴 쪼달리는 살림에 용돈도 없이 살아온 우리 부부에게 월 2만원의 적금은 쉬운게 아니었지만, 아내의 대승적인 결단에 나는 오늘 출근하자 마자 적금계좌를 만드는 것으로 번개같이 호응했다. 


1년 후, 나는 linotype에서 제작한 250불짜리 퓨츄라 패밀리 패키지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것이 된 퓨츄라를 마음껏 사용하여 퓨츄라와 파울레너에게 헌정하는 포스터를 만들것이다. 그리고…그리고…


다행히 나에게는 ‘그리고’의 이후를 를 생각할 수 있는 1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다.  





*유니버스(Univers) : 아드리안 프루티거(Adrian Frutiger)가 1957년 제작한 산세리프 서체. 처음으로 체계적인 폰트 패밀리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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