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길들여진다는 것

by 보싸

작년에 딸아이가 학교에서 밀웜이라는 것들을 가져왔다.

밀웜은 파충류들의 식사로 사용한다고 하는 애벌레인데, 자라서 성충이 되면 거저리라는 풍뎅이 같은 벌레가 된다. 발이 많으면 많아서 징그럽고 발이 없으면 없어서 징그러운 나는 발 없이 꿈틀거리는 그것들을 보고 기겁을 했다. 하지만 딸아이의 간절함에 동거를 허락했다.


아빠를 닮아 관심이 금방 식어버리는 딸은(우리 애들은 나쁜 것만 나를 닮았다), 밀웜에 대한 관심이 곧 식어버렸다. 그러나 놈들이 곧 멸종하리라는 나의 기대와 달리,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강한 내 아내가 밀웜을 열심히 돌보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밀웜들은 순차적으로 번데기가 되었고, 곧 거저리라는 성충이 되어 사육통 안을 기어 다녔다. 그리고 그날부터 거저리들의 생육과 번성이 시작되었다. 볼 때마다 짝짓기를 하고 있고 애벌레들이 생겨났다. 애벌레는 곧 번데기가 되어 성충이 될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번데기 하나가 사라지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궁금해하는 딸과 아내에게 거저리는 단백질 보충을 위해 밀웜 번데기를 잡아먹는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찾아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날, 놈들의 분리 수용이 시작되었다. 애벌레 동, 번데기 동, 성충 동. 성충 방에서 태어난 애벌레를 발견하면 애벌레 방으로 옮기고, 거기서 번데기가 된 애들은 따로 번데기 방으로 옮기고, 번데기에서 성충이 된 애들은 성충방으로 옮긴다. 그렇게 분류해서 사육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딸과 아내 추산 각 수십 마리들의 생명들이 각자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기절할 노릇이다.


사육을 시작하며 아내가 딸아이에게 내건 조건이 있었다. 올해 '경칩'이 되면 개구리도 깨어나고 완연한 봄이 되었다는 뜻이니, 그때는 모두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딸아이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오늘. 경칩이 되었다.


아침 등굣길,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며 이제 경칩이니 거저리가족들을 내보내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살짝 아쉬운 표정의 딸아이에게 어제 읽었던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자신을 길들여달라고 한 이야기. 우리가 무언가에 시간을 쏟고 사랑을 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길들인다'는 것이다. 너와 엄마가 거저리 가족들에게 시간을 쏟고 정성을 들인 것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거저리 가족을 저 산에 풀어준다면, 너는 저 산을 볼 때마다 거저리 가족 생각을 하겠지. 어린왕자를 만나기 전에는 무수히 많은 밤하늘의 별이 그냥 의미없는 별이었다가, 저 별 중 어딘가에 어린 왕자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따뜻해졌던 생텍쥐베리처럼. 너도 저 산을 보면 그렇게 될 거야. 그러면 저 산은 이제 더 이상 너에게 '그냥 산'이 아니라 '너의 거저리 가족이 살고 있는 산'이 되는 거지.


딸아이는 어제보다는 씩씩하게 학교에 들어갔다. 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오늘도 낯선 환경을 잘 '길들이며'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기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이들의 새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