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도 구차해지지는 말자
진영이의 첫 번째 아르바이트가 들어왔다.
진영이는 K대학 주위에서 아르바이트할만한 곳이 있는지부터 알아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진영이 어머니를 잘 아는 강 전도사님이 제안을 하셨다. 진영이가 자기 딸의 공부를 도와주면 안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강 전도사님은 첫째 부인과 사별한 어떤 사업가의 두 번째 부인으로 결혼하신 분이셨다. 그 남편은 사별한 부인과의 슬하에 3남매가 있었는데 부인을 병간호하느라 돈을 많이 썼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하던 사업도 어려워져서 매우 힘든 상태였다. 그의 어려움을 애타게 여긴 누이가 평소에 잘 알던 강 전도사님을 소개해 재혼을 하게 된 것이었는데 강 전도사님은 당시 초혼이었다. 사업에 실패한 남편은 매일 술로 실의를 달랬다.
강 전도사님은 생활력이 강하신 분이셨다.
무엇이든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술에 쩔은 남편과 3남매를 최선을 다해 부양했다. 당시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3남매는 낳아주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어머니가 들어오자 사춘기를 심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강 전도사님이 막내딸 은선이를 낳자 이제는 은선이 마저 놀리기 일쑤였는데 이 모든 걸 강 전도사님이 모두 사랑으로 안았다. 강 전도사님의 헌신으로 남편은 다시 재기할 힘을 얻었고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가족을 건사할 수는 있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아파트를 분양받아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남편의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들었을 때, 강 전도사님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신앙이 생기자 기도 중에 신학교로 가야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강 전도사님은 집과 가까운 압구정 교회에서 몇 년째 전도사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러는 중에 진영이 어머니의 담당 전도사가 된 적이 있었고 그때부터 진영이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진영이가 먹었던 전라도 김치는 강 전도사님이 보내 주신 김치였다.
강 전도사님은 딸 은선이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미리부터 좋은 신랑감을 찾아주고 싶어 했다. 은선이는 고1이었는데,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아서 강 전도사님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이복언니, 이복오빠들의 구박을 이유 없이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형제, 자매가 있어도 은선이는 항상 외로웠다. 은선이는 엄마를 닮아 외모가 출중했지만 항상 머리를 박박 밀고 다녔다.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라는 핑계였지만 머리를 밀고 다니면 아무도 은선이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강전도사님은 진영이라면 은선이의 좋은 베필이 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진영이 어머니로부터 진영이의 이야기를 들어 잘 알고 있었고 진영이와 같은 성품을 좋게 여겼다.
진영이는 동생을 잘 돌볼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부도와 외도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고 기도제목도 대입만점이라는 높은 목표를 세우고 애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셨다. 교회에서 중창단이 헌금송을 할 때 강 전도사님은 헌금 안내를 하시고 계셨는데 그때 중창단에서 노래 부르는 진영이를 보시고 매우 흡족해하셨다.
강 전도사님은 진영이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냥 주면 진영이와 진영이 어머니가 부담스럽게 생각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신 은선이의 과외선생으로 등록금과 생활비도 마련해 줌과 동시에 은선이와 친하게 붙여놓으려는 심산이었다.
진영이는 어머니로부터 강 전도사님과 은선이에 대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진영이는 강 전도사님을 교회에서 만날 때마다 항상 어머니를 대하듯 공손히 섬겼다. 은선이가 중학교 다닐 때 강 전도사님과 함께 오는 은선이를 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은선이는 머리를 박박 밀었지만 두상이나 눈이 초롱초롱해서 예쁘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뭔가 속 깊은 곳에 아픔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외는 당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돈 많은 사람들은 힘과 배경이 있었고 강남의 힘 있는 부모들은 유망한 명문대 대학생들을 고용해 자녀들의 과외선생으로 삼았다. 불법이었던 만큼 과외비는 비쌌고 교통비를 더해 주거나 성적이 오르면 보너스를 주기도 하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진학하면 새 차를 사 주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과외선생이었던 남자와 과외받던 여학생이 결혼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K대학과 1시간 이상이 걸리는 먼 거리였지만 진영이는 이보다 더 좋은 아르바이트를 찾을 수 없었다. 두 달만 하면 등록금 전액이 해결되는 큰돈이었다. 진영이가 다니는 K대학은 명문대학이 아니었는데도 이런 큰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진영이는 사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씀은 사실이었다.
처음 진영이가 강 전도사님 댁에 은선이 과외를 위해 방문하기로 한 날, 진영이 어머니는 5시 조금 넘어서 그 댁에 가라고 하셨다. 본래 비밀과외는 저녁식사 후 밤늦게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5시는 아직 환했고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압구정동까지 가려면 아무리 늦어도 3시 반에는 출발을 해야 했다. 첫날이었기 때문에 진영이는 일찍 학교에서 출발하면서 강 전도사님을 만나면 시간을 좀 늦추어 주실 수 없는지 여쭈어 볼 참이었다.
진영이는 과분한 대접을 받았다.
진영이가 5시 5분 전 즈음에 강 전도사님 댁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고 집에 들어섰을 때, 집에는 강 전도사님의 남편분도 계셨다. 강 전도사님은 마치 귀한 손님이 온 것처럼 진영이를 안아주고 잘 왔다고 하시며 집으로 안내하시고 남편에게도 인사를 시켰다. 남편분도 진영이를 보자 웃음을 지으시며 반겨주셨다. 강 전도사님은 우아한 청록색 드레스에 레이스 있는 앞치마를 하시고 계셨다. 강 전도사님이 방에 있던 은선이를 불러 내셔서 진영이에게 인사를 시키셨다. 오랜만에 만난 은선이는 이제 머리가 많이 자라 꽤 어여쁜 아가씨 티가 났다. 강 전도사님은 진영이에게 은선이 공부를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는지 은선이 방에 들어가서 좀 알아봐 달라고 했다. 오늘은 첫날이니 영어, 수학, 과학 등 과목을 각각 봐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진영이는 은선이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고생 방은 난생처음이었는데 진영이 여동생 영은이는 중학생이어서 연예인 사진이 걸려 있는 흔한 중학생 방이었다면 은선이 방은 온통 책이었고 고급 티크제 책상과 멋진 책꽂이가 잘 어우러져 있어서 책을 좋아하는 진영이의 눈을 금세 사로잡았다.
그리고 의자는 너무나 편했고 처음 만져본 고급 티크제 책상의 감촉은 너무나 부드럽고 환상적이어서 이런 곳에서 책을 본다면 일주일 동안 잠 안 자고도 책을 볼 수 있을 것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선이는 과외를 받아야 할 필요가 없는 학생이었다.
문제는 과외수업에서 시작되었다. 수학이 어렵다고 해서 참고서와 교과서를 봤는데 문제를 풀어 보라고 해도 곧잘 풀고 틀리지 않았다. 어쩌면 진영이보다 오히려 실력이 더 나아 보이기까지 했다.
다음에는 영어였다. 영어는 진영이도 아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은선이의 영어 실력은 이미 고2 이상으로 보였다. 영어도 사실상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진영이는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과학이었다. 그나마 과학은 여학생이 어려워하는 과목이어서 그런지 은선이에게 몇 가지 가르쳐야 할 부분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렇다고 과외를 받아야 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세 과목을 이리저리 뒤지고 있는 사이, 방문이 살짝 열리고 강 전도사님이 저녁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진영이는 강 전도사님이 계시는 주방으로 향했다.
큰 부엌에 주방 한가운데에는 멋진 네모형 긴 티크제 식탁이 놓여 있었고 고급 의자가 4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음식들이 그 큰 식탁을 거의 채우고 있었는데 음식의 향이 너무 좋아서 진영이는 이 음식들을 보고 향을 맡자마자 이미 배가 부른 것처럼 느껴졌다. 식탁 안쪽에 강 전도사님과 남편이 앉으시고 전도사님의 앞에 진영이가 앉고 그 곁에 은선이가 앉았다. 진영이와 은선이가 나란히 앉은 모습을 보신 강 전도사님은 아주 만족해하셨다. 그날 저녁식사는 진영이가 몇 년간 먹어보지 못한 진수성찬, 왕의 식탁 그 자체였다. 어떻게 아셨는지 진영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차려져 있었고 맛이 한결같이 좋아서 자기의 양을 훨씬 넘겨 포식을 하고 말았다. 강 전도사님은 진영이를 마치 자기 친아들을 대하듯 이것저것 음식을 옮겨 가며 진영이가 편안히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셨고 진영이도 '네 감사합니다. 전도사님.'을 연발하며 음식을 받아먹기에 바빴다. 그런 엄마와 진영이를 은선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보면서 젓가락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저녁식사는 아주 성대히 치러졌다.
전도사님이 해주신 기도는 이미 진영이를 잘 아는 어머니의 기도였다. 그 기도하는 목소리와 음성이 마치 진영이 어머니를 연상시켰다. 식사가 끝나고 다시 진영이는 은선이와 나머지 공부를 하다가 더 이상 은선이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마루에서 진영이를 기다리고 계시던 강 전도사님은 웃으시며 ‘수고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진영이에게 흰 봉투를 건네셨다.
그 봉투 안에는 등록금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진영이는 이걸 받을 수 없다고 한사코 사양했다. 그렇지만 전도사님은 그의 손을 굳게 잡으시고 와줘서 너무 고마우며 매주 같은 시간에 꼭 와달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는 왠지 위엄이 있으면서도 어머니 같은 자상함이 묻어 있었다.
진영이는 현대아파트를 나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머니를 만나면 이 돈을 강 전도사님께 다시 돌려드리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만난 어머니는 이미 강 전도사님에게 들었다며, 수고했다고 다음부터는 과학만 가르치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진영이는 속사정을 솔직히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이건 그냥 진영이에게 밥을 차려 주고 돈을 주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은선이는 자기보다 낫다고,, 가르칠 게 없다고…그리고 학교에서 그 집까지 너무 멀고 시간을 너무 잡아먹는다고… 그냥 학교 앞에서 아르바이트를 찾겠다고…
이 모든 걸 들으신 어머니는 하지만 생각이 다르셨다. 결국 돈을 이미 받았으니 돈 받은 만큼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한 달만 일단 해 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결국 한 달간 불편한 과외 아르바이트를 계속하게 되었다.
불편한 돈벌이 (과외)의 루틴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음식은 항상 만찬이었으며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진영이에게 강 전도사님이 이것저것 진영이의 학교생활이라든가 목표라든가 기도제목 같은 걸 물어보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은선이가 어떤지 물으시곤 했는데 공부에 대한 것을 진영이가 대답하면 그게 아니라 은선이 성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시 물으셨다.
그럴 때마다 은선이는 어린아이처럼 뾰로통 해져서 입을 삐죽거리고 퉁퉁거리며 발로 의자를 툭툭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강 전도사님은 은선이를 엄하게 꾸짖으셨다.
이렇게 해서 한 달이 채워진 날,
그날도 강 전도사님이 차려주시는 만찬의 저녁식사와 보살핌의 말씀들, 은선이와 하는 불편한 과외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음 달 치 봉투를 건네시려는 강 전도사님께 그동안 감사했다고, 은선이는 저 없이도 잘하니까 다른 대학생을 구하시라고 하며 그대로 그 집에서 도망치듯 탈출했다.
‘가난해도 구차해 지지는 말자.’
강 전도사님 댁을 나오면서 진영이는 생각했다. 불편한 돈벌이 (과외)는 진영이의 자존심을 일깨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