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만든 무대

by 보스턴임박사

우리 모두는 각자의 상황과 어려움을 안고 그걸 딛고 이기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바로 삶의 진정한 의미이다.


의무교육.

12년의 의무교육의 목표는 말하자면 초등학교 6년은 중학교에 가기 위한 것이고 중학교 3년은 고등학교를 가기 위한 것이고 고등학교 3년은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것이다.

이걸 교육이라고 부른다면 과연 그럴까.

신기에게 억지로 돈을 빌리게 된 인수는 사실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돈을 밀어내기에는 인수 자신의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았다. 그러나, 인수는 신기에게 하루속히 이 돈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헌금송을 준비하는 그 2주 동안 인수는 공사장에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일당은 많지 않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일을 강제로 쉬어야 했기 때문에 돈은 남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해서는 아무리 일을 많이 한다고 가난에서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라고 인수는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수가 대학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이미 몇 년 늦어진 고등학교 생활이었기 때문에 그만둔다고 해서 큰 미련은 없었다. 대신 목표는 확실해졌다. 먼저 돈을 벌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후 다시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 자격을 얻고 대학에 가기로 생각을 한 것이다. 노동으로 매일 힘들고 공사장에서 생긴 크고 작은 부상들이 인수의 몸을 계속 갉아먹어 갔지만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인수가 읽었던 몇 권의 책 덕분이었다.


인수가 다니던 음악다방의 사장님은 원래 철학을 전공한 분이셨다.


1970년대에 신촌에 있는 대학에서 철학을 배우셨는데 그 당시 철학과 대학생이었던 사장님은 학교 공부보다는 데모를 하는 날이 더 많았다고 했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하려고 했지만 데모를 한 전적 때문인지 번번이 떨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음악다방을 하게 되신 분이었다. 음악다방 한편에 몇 권의 철학자들의 책이 있었는데 인수는 그 책방에서 함석헌 선생님의 책 ‘씨알은 외롭지 않다’를 틈틈이 읽었다. 함석헌 선생님께서 4번이나 감옥에 가셨는데도 그런 생활을 대학생활에 비유하시며 의연히 견디시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과 함께 용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함석헌 선생님의 책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라는 책이 있어서 그 책도 읽게 되었는데, 현재의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고 뚜벅뚜벅 걸어 가시는 선생님의 삶의 철학을 통해서 인수는 아주 큰 삶의 희망의 궤적을 찾게 되었다.

그 이후로부터 인수는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의 목표만은 절대 잃지 않고 조금 더디더라도 꿋꿋이 이겨내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인수가 음악다방을 그만두고 노동일을 하면서 틈틈이 종로의 세운상가를 기웃기웃거렸다.


인수는 정우로부터 조금씩 기타를 배우게 되었는데, 이제 어느 정도 기타를 튕길 수 있게 되니 자기 기타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끔 비가 와서 일을 못하게 되는 날이면 집에서 슬그머니 나와 하루 종일 세운상가 주변을 서성거렸다.

통기타를 한 대 사려고 했지만 통기타 가격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통기타 가격을 꼼꼼히 보면서 악기상을 둘러보다가 나와 보니 그 옆에 전자제품들이 늘어져 있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음향기기를 잘 다루는 인수는 정우가 가져오는 워크맨을 혹시 살 수 있을까 해서 전자제품이 늘어있는 곳을 두리번거리게 되었는데, 거기에 “사람 구함”이라는 공고를 보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일 것 같아 보였다.


그곳 사장님과 갑자기 인터뷰를 보게 되었는데 젊은 사장님은 인수를 위아래로 훑어보시더니 어디에 사느냐, 학교는 어디까지 다녔느냐 등등을 물어보시고 인수가 고등학교 중퇴를 했어도 거짓말하거나 돌려 말하지 않고 당당히 말하는 것과 중저음의 목소리에 발음이 또박또박함을 듣고 믿을만하다고 생각을 하셨다. 그 이후 인수는 공사장 일과 전자상가 일을 나누어하게 되었다. 새로 시작한 전자상가 일은 용어 자체가 쉽지 않아서 처음 일하는 인수는 여러모로 어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다행히 사장님이 꼼꼼하신 분이시고 인수에게 마치 형님처럼 대해 주셔서 인수는 그럭저럭 일을 점차 익혀 나가며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인수가 전자상가 일만 할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공사장 일과 전자상가 일을 반반 하게 된 데에는 중창단 때문이었다.


전자상가 일을 매일 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려면 일요일과 혹시 모를 주중의 연습을 참석할 수 없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전자상가일은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3일 일하는 것으로 하고 월, 수, 금, 일요일 중 연습이 있으면 그 날짜에 연습을 하고 연습이 없으면 공사장에서 일을 하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인수가 전자상가에서 받는 돈은 공사장에서 받는 것보다 처음에는 오히려 적었지만 3개월 수습을 마치고 인수가 일을 익히고 나름대로 사장님에게 인정을 받게 되자 그 이후부터는 시급이 올라서 어느새 공사장에서 받는 시급을 넘어서게 되었고 당장은 아니지만 친구들이 고3이 되면 어차피 중창단을 하지 못할 거니까 그때부터 매일 전자상가에서 일을 하는 것으로 바꾸면 조금씩 시급도 올리고 언젠가는 월급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생기게 되었다.


매년 가을이 되면 고등부에서는 외부 학생들을 초청하는 “문학의 밤”이라는 행사를 주최했다.


그동안 문학의 밤에서는 주로 시낭송, 연극, 합창, 중창 같은 걸 했는데 우리 복사중창단이 생기면서 우리에게도 한 순서를 맡아서 해 보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헌금송을 한 이후부터 모든 중창단 멤버들은 사실 이 문학의 밤 행사에 서게 된다는 것에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진영이와 현서는 작년 문학의 밤에서 함께 연극을 했었는데 올해에는 함께 중창단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둘에게도 다른 의미로 새롭게 다가왔다.

보통 문학의 밤에서는 3곡 정도는 불러야 했다. 특히 매년 일반 고등학교 남자중창단을 초청하는데 올해에는 정태가 다니는 학교의 남자중창단이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은근히 경쟁심 마저 드는 것이었다.

그동안 연습한 ‘비가 내리네’, ‘주의 크신 은혜’, ‘평화의 기도’는 모두 느린 노래여서 좀 빠르고 경쾌한 곡이 중간에 하나 들어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정우와 진영이, 그리고 신기는 문학의 밤을 위해 어떤 곡을 연습하면 좋을지 그동안 알아보는 중이었다.

이번에도 정우가 노래를 골라왔다.

“내 생각에는 좀 경쾌하게 부를만한 노래로 ‘Vive L’A’more’를 부르면 어떨까 하는데 이 노래가 냉면이라고 하는 노래 있잖아. 그 곡조와 같은 원작이거든? 이걸 숭실 OB에서 부른 게 있는데 아주 빠르고 박자가 착착 맞아야 해. 다들 어때?”

신기가 말을 이어 대답했다.

“아, 나도 그 노래 들어본 적 있어. 그런데 노래 가사가 좀 교회에서 부르기 그런데 이게 원래 술집에서 부르는 노래라서 뭐 장가 못 간 노총각 주름 펴고…이런 가사가 나오고 원래 술 마시자 뭐 이런 걸걸?”

여기에 진영이가 의견을 더했다.

“그럼 그 가사를 좀 개사하면 되지 않을까? 노래는 그대로 하고. 어차피 외국 노래니까 개사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진영이의 이 말에는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Vive L’A’more’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 노래의 가사를 보니 이건 친구와 동료들의 우정을 얘기하는 가사여서 우리들이 중창단을 만들고 그동안 함께 해 온 그동안의 마음을 대신 얘기해 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노래가 경쾌했을 뿐만 아니라 약간 나사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면서 우리들의 자유분방하고 싶은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기도 해서 다들 이 노래를 연습하면서 낄낄거리며 즐거워했다.

처음에는 노래를 아주 천천히 한음 한음씩 찍어서 연습했다. 본래 정우가 틀어준 숭실 OB의 노래를 들어보면 매우 빠르고 속도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빨라도 박자가 서로 너무나 잘 들어맞아서 마치 도돌이표를 가진 노래처럼 들렸고 같은 단어가 여기저기서 삐죽삐죽 튀어나오면서 노래가 흘러가는 그런 노래였다.

세컨드 테너의 정우와 정태는 아주 둘이 죽이 잘 맞았다. 심지어 춤을 추듯이 어깨와 허리를 들썩 거리며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이에 질세라 신기와 자유도 그 옆에서 높은 하이 테너의 소리를 더하며 넷이 아주 댄스 삼매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 대신 바리톤과 베이스 파트는 음이 낮아서 그런지 조금은 차분하게 연습을 하고 있었다.

광웅이와 인수는 박자를 맞추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어서 연습을 하다 보면 둘이 쳐다보고 폭소가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현서는 그럴 때마다.

“오빠-드–을!! 집중!! 집중 요!!”

이러면서 마치 누나처럼 우리에게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그런다고 노래 흥이 이렇기 때문에 통제는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진영이는 노래가 너무 자지러지는 느낌이 들면 곡을 ‘주의 크신 은혜’나 ‘비가 내리네’로 살짝 바꿔서 전체 분위기 자체를 바꾸는 식으로 해서 팀 분위기를 차분하게 한 후 얼마 있다가 분위기가 너무 쳐지는 느낌이 있을 때 다시 ‘Vive L’A’more’로 분위기를 올리는 식으로 팀의 전체 연습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면서 10대 남고 학생들의 템포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문학의 밤을 한 달 정도 남겼을 때, 문학의 밤을 준비하는 다른 팀에서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복사중창단이 노래 연습만 할 뿐 문학의 밤 행사를 위해 해야 하는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을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들은 그런 일이 있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우리 연습하기가 너무나 바빴던 것이다.

그래도 전체 고등부 행사였던 만큼 우리 모두가 힘을 쓸 일이 있으면 그때 그때 눈치 있게 힘도 쓰고 물건도 나르고 하면서 행사팀을 도와주려고 애를 썼다. 그런다고 해서 볼멘소리가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어느 정도 연습도 진행되고 할 무렵, 진영이는 정우와 신기와 함께 반주곡 하나를 더 연습하면 어떻겠느냐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무반주곡은 중창단이 연습하기엔 좋지만 왠지 반주자인 현서에게는 좀 심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현서도 8명의 오빠들의 노래, 화음, 끼를 보며 감상하고 즐기는 것도 좋았지만, 자기 반주곡인 ‘비가 내리네’ 이후에 계속 무반주곡만 연습을 하게 되니, 한 손가락으로 띵띵 건반을 치게 되고 이것이 본인에게도 무성의해 보이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좀 희한해 보였다.

그래서 정하게 된 연습곡은 크리스마스를 위한 몇 가지 곡들이었는데 하나는 “Love is Blue”이고 또 하나는 “White Christmas”였다. 이제 두 곡 정도 더 연습하는 건 멤버들에게 그리 큰 어려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들 은근히 새로운 곡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두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피아노 반주가 필요했고 나름대로 피아노 기교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 노래를 골랐고 크리스마스이브 행사 때 중창단에서 부를 노래를 미리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하나는….


크리스마스 발표가 우리 고2들이 하는 마지막 발표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문학의 밤을 준비하면서 6명의 고2 멤버들이 따로 이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고3이 되면 어차피 대학입시 준비를 위해 바빠질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한가하게 중창단을 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래서 일단 1년간은 지금 있는 광웅이와 자유 2명을 중심으로 새로 들어오는 중3과 지금의 고1을 모아서 다시 8명으로 새로운 기수를 만들어 보자는 데에 의견의 일치가 모아졌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지나간 게 아쉬웠지만 그래도 대학에 들어가면 또 시작할 기회가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우리 모두는 상상의 나래를 휘날리고 있었고 그래서 미래가 모조리 이미 다 된 것처럼 생각하기까지 했다.


드디어 문학의 밤의 날이 되었다.


먼저 우리의 가장 처음 곡은 ‘비가 내리네’로 시작했다.

두 번째 곡은 ‘Vive L’A’more’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곡은 ‘주의 크신 은혜’로 마무리되었다.

이 세곡을 부르기 전, 우리는 함께 모여 간절히 서로를 위해 기도했다. 그동안 여기까지 함께 올 수 있었던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니었다고 우리 모두는 생각했다. 원래 서로 모르는 사이였고 정말 아주 우연과 우연의 연속으로 8명이 모였다. 그리고 그 모인 멤버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지금까지 왔다. 헌금송으로 첫 발표를 했고 문학의 밤으로 두 번째 발표를 한 아주 초라한 시작이지만 우리들이 실제로 여기에 뿌린 시간과 마음과 헌신은 계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 우리 모두의 눈은 충혈되어 퀭하고 살짝 물이 담긴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보고 웃었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12화초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