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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통 Dec 30. 2020

엄마의 떡만둣국

나의 소울푸드 이야기

요즘은 자녀가 셋만 돼도 ‘다자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다자녀. 나는 88년생 내 또래의 친구들 사이에서도 다자녀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대가족 사이에서 나고 자랐다. 식사가 끝나면 주방 개수대가 넘칠 만큼의 접시를 닦아내는 일도 우리 집에선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다.

미식가이자 대식가인 아버지, 아기새 마냥 입 벌리고 끼니를 기다리는 자식들.

돌이켜보면 엄마는 타고난 음식 솜씨도 좋으셨겠지만, 이런 환경이 엄마를 ‘금손 집밥 여왕’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도 엄마는 손님상 차리기를 마다하지 않고 좋아하셨는데, 일찍 기숙학교로 들어간 언니와 달리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집에서 통학을 했던 내가 주로 엄마의 주방 보조 역할을 맡고는 했다.  

옆에서 바라본 엄마는 대식구의 식사와 명절, 제사 요리뿐 아니라 각종 모임의 음식 담당까지 도맡아 하는 요리 고수셨고, 특히나 가짓수가 많고 대량의 조리를 해야 할 때 엄마의 요리 실력은 더 빛이 났다.

소울 푸드가 의미하는 바가 ‘ 다음 중 가장 맛있는 엄마의 음식을 고르시오.’는 아니지만,

시간이 흘러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나의 소울 푸드는 단연 엄마의 떡만둣국이다.  

매 년 구정 이면 온 식구가 둘러앉아 나눠 먹던 엄마표 떡만둣국은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가슴 따뜻한 추억의 음식이다. 해가 바뀌고 설날이 되면 우리 식구들은 소를 가득 채운 김장 다라이(대야)를 놓고 둘러앉아 손만두를 빚었는데 어림잡아 흡사 만두 맛집 일일 판매량에 맞먹는 어마어마한 양의 대 작업이었다.  

누구 하나 엄마의 만두를 싫어하는 이도 없었을뿐더러 앞서 소개한 미식가이자 대식가인 아버지를 위해 엄마는 해마다 정성껏 소를 만들고, 반죽을 주무르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우리 집 만둣국 속 만두는 잘 익은 신김치가 들어간 고기 김치 만두였다.

고기만두도 아니고 김치만두도 아닌 고기 김치 만두.

우리가 흔히 시중에서 사 먹는 김치만두는 속이 빨갛고 매운맛이 강하게 느껴지는데 비해,  

엄마의 만두는 김치의 아삭함과 맛은 그대로 느껴지면서 고기만두의 풍미도 잃지 않는 완벽한 조합의 만두였다. 느끼하지도 맵지도 않아 끝없이 뱃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맛.  

실제로 그 많은 양의 만두들은 냉동실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며칠도 못 가 동이 났다.


만두를 빚는 날이면 엄마는 주방 서랍에서 베보자기를 꺼내어 만두소에 들어가는 숙주와 당면, 으깬 두부를 꾹꾹 힘주어 짜냈다. 맛있게 익은 신김치는 빨간 양념을 물에 헹궈내지 않고 그대로 다진 다음 김치 국물만 짜냈다.  

큰 대야에 앞서 준비한 재료와 돼지고기 다짐육을 넉넉히 넣고 다진 대파와 마늘을 넣는데 이때, 마늘이 아주 넉넉하게 들어갔다. 양념은 소금과 후추 그리고 약간의 진간장과 참기름으로.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맛있었던 이유는 시원한 엄마표 김치가 큰 몫을 했으리라.

이렇게 소가 준비되고 나면 다음으로 만두피를 반죽하는데 찰지고 얇은 만두피를 만들기 위해선 다시 몇 차례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표면이 매끈하게 완성된 반죽을 한 주먹씩 떼어내 길게 말아 늘린 다음 일정한 간격으로 썰어 주고, 이 작업이 끝나면 언니와 나는 잘린 반죽을 하나씩 가져와 지름 5~6cm가량의 넓적하고 밀기 좋은 형태로 빚어 덧가루를 묻혔다.

그럼 엄마는 우리가 건넨 반죽을 왼손으로 늘리고 오른손으로 밀대를 밀고 …  

순식간에 엄마의 손 끝에서 완벽하고 둥그런 만두피가 만들어졌다. 하얗고 뽀얀 밀가루가 뿌려진 나무 도마 위에서 밀대를 밀고 있는 엄마의 손은 마치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스 속 공장 씬을 연상케 했는데, 탁탁 탁탁 일정한 박자에 맞춰 흐트러짐 없이 만두피가 쌓여갔다.  

남은 반죽은 굳지 않게 젖은 면포로 덮어둔 상태로 작업을 이어갔다. 엄마와 우리는 만두소를 채워 넣어 방울 만두, 나뭇잎 만두, 반달 만두 각각의 모양으로 만두를 빚어냈다. 곱게 빚어진 만두는 차곡차곡 쌓여 냉동실로 들어갔다.  

몇 시간씩 둘러앉아 만두 빚기를 끝내고 나면 남은 작업은 진한 양지 고기 육수를 만드는 일이었다. 양지는 찬물에 담가 핏물을 제거하고 파, 양파, 마늘, 통후추와 함께 한 시간 이상 푹 삶아 낸다. 잘 익은 고기는 건져내 고명용 크기로 잘게 찢어 준비하고, 진하게 우러난 고기 국물은 육수만 걸러내 주방 한편 시원한 곳에 두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자고 일어나면 육수 위로 고기 기름이 둥둥 떠올라 있었고, 기름 덩어리를 국자로 살살 걷어내면 한결 깔끔한 육수가 만들어졌다.

준비된 육수에 떡국 떡과 전 날 빚은 만두를 넣고 만두가 동동 떠오를 때까지 끓이는데 이때, 간은 조선간장과 소금 후추로 맞추고 달걀지단과 김가루, 그 위로 잘게 찢어둔 양지를 듬뿍 올리면 비로소 엄마표 떡만둣국이 완성됐다.

며칠에 걸쳐 장을 보고 정성껏 준비한 차례상을 물리고 나면 식구들은 다 같이 둘러앉아 새해를 기념하며 떡만둣국 한 그릇 (혹은 두 그릇)을 나눠 먹었다.  

아기 주먹만 한 속이 꽉 찬 만두를 반으로 가르고 뜨끈한 국물을 한 숟가락 쪼르르 부은 다음 시원한 김장김치 얹어 한 입, 수저로 푹푹 으깨서 떡국 떡과 양지 올려 또 한 입.  

그렇게 우리 식구들은 엄마의 떡만둣국과 함께 매년 또 한 살 나이를 먹었다.  


그때는 이 모든 풍경이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었고, 다음 설 에도 그다음 설에도 똑같이 둘러앉아 만두를 빚고 다시 이 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애석하게도 내 나이 스물여섯이 되던 그 해의 설날부터 우리는 엄마 없는 명절을 보내야 했다. 엄마도 엄마의 떡만둣국도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지만, 한동안 우리 가족은 명절을 외면하며 보냈다. 정성 가득한 떡만둣국 없이도 자연의 순리에 따라 또 한 살 나이를 먹을 뿐이었다.  

엄마가 병 중에 계시다 돌아가신 1년 후 나는 오랜 연인이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고 이제는 또 다른 명절 풍경에 익숙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는 엄마의 정성 가득한 떡만둣국이 사무치게 그립다.  

내 소울푸드가 B사의 버거나 남산의 왕돈가스 같은, 언제고 찾아서 추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 음식이면 얼마나 좋을까?

좋아하던 엄마의 음식 중 하나였던 만두는 엄마의 부재와 함께 나의 소울 푸드가 됐고,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거나 마음이 허한 날이면 고민 없이 떠오르는 음식이 됐다.  

그리고 몇 해 전부터, 나 역시 설날이 다가오면 엄마처럼 손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따끈한 떡만둣국을 끓여 함께 지내는 남동생(일명 끝방 총각)과 남편과 함께 나눠 먹는다.  


세상의 수많은 음식 중에 내 음식이 누군가의 소울 푸드가 될 수 있을까?  

단순한 메뉴가 아닌 그 사람이 만든 음식 그 자체.

엄마는 단지 가슴과 머리로만 기억되는 게 아니라 맛으로도 기억하는 존재인가 보다고  

어쩌면 내가 그리운 건 설날 나눠 먹던 떡만둣국이 아니라 그 풍경 속에 담긴 엄마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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