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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통 Mar 30. 2021

서서히 스며드는

이 글은 '평양냉면'입니다.

평양냉면을 처음 맛 본 후의 충격이 기억난다.

혹자는 '걸레 빤 물'이라 하고, 누군가는 진정한 미식가의 음식이라고 극찬하는 맛, '평양냉면'

나의 평양냉면 첫 경험2014년 초 여름이었다.  

그 해 여름 끝자락에 식을 올린 우리 부부는 결혼 준비를 하는 동안 '스. 드. 메의 메카' -웨딩 업계 용어로 스튜디오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의 줄임말 -게 다양한 웨딩 체가 몰려 있던 현동과 청담동 일대에 자주 방문하게 됐는데, 주말이면 그 근방에서 볼 일을 보고 점심 데이트를 즐기고는 했었다.

그날도 점심 메뉴를 고민하던 차에 남편 위도 식힐 겸 시원한 냉면을 먹자고 제안했다.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하는 결혼 앞둔 시점에 가격 부담도 적고, 더위를 식히기에도 괜찮은 메뉴 선택이었다.

먹고 나면 분명 배는 부르지만 어쩐지 적당히 가볍게 먹 느낌은 결혼을 앞두고 다이어트에 돌입한 신부의 점심 메뉴로도 썩 나쁘지 않은 듯했다. 

초록창에 [논현동 냉면 맛집]을 검색하자 냉면 맛집들이 연이어 검색됐다. 그중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언젠가 TV에서 가수 존박 씨가 단골이라고 소개했던 '평양*옥'이라는 식당이었다. 그는 냉믈리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평양냉면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기로도 유명한데, 한 프로그램에서 나와 이 식당의 지점별 냉면 맛을 구분해내는 냉면 성애자 다운 모습을 보인적도 있었더랬다.

그전까지 평양냉면을 먹어본 적 없던 우리는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곳으로 향했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부는 3대에 걸쳐 운영 중이라 소개와 같이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났다. 가게가 유지된 세월만큼이나 단골손님도 많아 우리가 착석한 방 안의 손님 대부분이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이셨는데, 순간 우리의 기대치도 한껏 상승하기 시작했다.

내 경험에 의하면, 맛집이라고 소개된 곳에 로컬 손님이 많은 집. 그중에서도 어르신 손님들이 더러 계신 곳이라면 어느 정도 맛 보장이 된다는 소리였다.

평양냉면 두 그릇과 접시만두를 주문했더니 만두 양이 많다며 반 접시만 하셨다. 메뉴판에는 없었지만, 그렇게도 주문을 받으시는 모양이었다. 나는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무릎을 위아래로 달달달 흔들어가며 치팅데이에 대한 즐거움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게다가 처음 맛보는 음식이니 절로 신이 났다.

오래지 않아 이블엔 그릇들이 놓였다. 주먹만 한 왕만두 세알과 레트로 한 쇠그릇에 담긴 멀건 냉면이 내려다 보였다. 미리 사진을 보고 오기는 했지만  볼품없는 첫인상은 다소 당혹스러웠다.

소위 말하는 sns용 음식 플레이팅과는 거리가 멀었다. 투명한 육수에 달걀 반개, 동그랗게 썰린 오이 몇 조각과 고기 두어 점이 툭하니 얹어져 있었다. 

조심스레 육수를 한 스푼 떠먹었다.

'이게 무슨 맛이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맛이었다. 연이어 다시 한 스푼.

다시 먹어봐도 묘했다.

분명 무슨 맛이 나긴 나는데 맛이 안 난다. 얼음 동동 띄운 새콤하고 진한 육수의 함흥냉면에 길들여진 내 입맛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맛이었다. 그저 싱겁거나 밍밍한 맛이 아닌 아주 아주 묘한 감칠맛이 따라왔다. 슴슴하다는 표현은 평양냉면을 위해 존재하는 듯, 그것은 그야말로 '슴슴함의 극치'였다. 곧이어 내 주먹만 한 만두를 반으로 쪼갰다. 두부가 많이 들어간 담백한 만두였다. 워낙 만두를 좋아하다 보니 그나마 맛있게 먹을 수 있었는데, 정작 메인 메뉴인 평양냉면에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김치 조차 허여 멀 건했다. 이게 대체 뭐가 맛있다는 거야?

앞에 앉은 편은 후루룩 후루룩 면치기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맛있냐는 질문에는 대답이 없었다. 그도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워낙 면요리를 좋아하니 그럭저럭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차마 3분의 1도 채 먹지 못하고 도전을 포기했다.

내 평양냉면 첫 도전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미각이라면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왜 내 입맛에는 영 맞질 않는지, 살짝 자존심까지 상했다.

그러다 며칠 후 문득, 불현듯 갑자기!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토록 맛없게 먹고 나와서는 다시 먹고 싶을 건 뭐람. 나도 미식가의 입맛을 갖고 싶다는 오기와 다시 먹으면 잘 먹을 것 같은 도전 정신이었을까? 그것은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평양냉면이 생각났는지 다시 먹으러 가자는 내 제안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방문을 했다. 진*평양냉면이라는 곳이었다.

다시 육수부터 후루룩. 

어랏? 이번에는 맛이 조금 더 느껴졌다. 애초에 첫 방문지보다 간이 (아주 약간) 더 센 것도 같았고, 이번에는 구수한 메밀면의 맛도 느껴졌다.

그러나 여전히 한 그릇을 다 비워내는 건 무리였다. 김치에 의지해 반 그릇을 겨우 비우고 나왔다. 그래도 아주 조금씩 평양냉면의 맛을 알아가는 것 같았다.

이후로 한참 동안 우리는 "냉면 먹으러 가자"라고 하면 당연히 평양냉면을 떠올리고는 또 다른 평양냉면 맛집을 찾아 나섰다. 남편은 완전히 그 맛에 빠져들었고, 이젠 나도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워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최근 몇 년간은 도산공원 쪽에 위치한 '강*면옥'에 자주 가고는 하는데, 맛은 물론이고 어른들을 모시고 가기에도 적당한 인테리어가 한몫을 한다. 메뉴가 다양해 평양냉면이 아니더라도 선택지가 많고, 위치상 주변에 맛있고 예쁜 카페들이 많아 후식까지 해결하기 좋다는 이유에서다. 워낙 몸이 냉한 체질이라 한 겨울을 제외하고는 종종 평양냉면을 먹으러 다니는데, 사실  이 음식은 북한에서도 겨울철에 즐겨 먹던 음식이라고 한다. 늦가을에 수확하여 길고 긴 겨울 내내 평안도 일대에서 가장 흔하게 즐겨 먹던 농작물이 바로 메밀이었다고. 평양냉면의 면은 메밀의 함량이 높아 뜨거운 육수에서는 쉽게 풀어지는 걸 고려해 차가운 수의 형태로 발달한 것이 지금의 평양냉면이다. - 이하 나무 위키 참조-


지난 주말, 따뜻해진 봄 날씨에 스멀스멀 시원한 평양냉면이 먹고 싶어 어머님을 모시고 먹으러 다녀왔다.

오랜만에 먹으니 구수한 면과 슴슴하기 짝이 없는 육수가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겨울이 끝나고 오랜만에 찾은 평양냉면. Photo by 서보통


나는 식당에서 권하는 특별한 레시피가 없는 이상 냉면에 겨자나 식초를 첨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맛을 즐기는 편인데, 이 날따라 냉면 자체의 감칠맛이 도드라졌다. 아~ 맛나다.

확실히 매력이 있다.

종일 평양냉면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앞으로 써내려 갈 내 글들도 이 냉면처럼 흘러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멋들어진 치장 없이도 묘한 감칠맛과 중독성이 있고, 화려한 미사여구나 어려운 단어를 남발하지 않고도 그 자체로 서서히 스며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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