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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통 Feb 28. 2021

커피믹스에 에이스를 찍어 먹는 날

엄마의 시에는 커피 향이 묻어 있었다.

예전 나에게는 응큼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엄마의 시'를 찾아 몰래 읽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DBS 방송국 (동아방송, 1980년 언론 통폐합 당시 지금의 KBS에 흡수 통폐합되었다.)의 라디오 작가로도 일을 하셨던 엄마 대식구 살림을 책임지는 중에도 읽고 쓰기를 즐겨하셨다.

사는 게 바빠 책 읽을 여유가 없으셨던 때에는 가게에 놓인 여러 신문사의 신문을 책 대신 읽으셨다.

느 날인가 엄마의 화장대 위로 찢긴 종이 한 장이 올려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휘갈겨진 글씨체로 시 한 편이 담겨 있었다. 태어나 처음 읽는 엄마의 시가 담겨 있었다.

내가 그것에 대해 묻자 엄마는 비밀을 들킨 소녀처럼 부끄러워하시며 종종 시를 쓰고 있다고 하셨다.

미처 숨기지 못한 한 편의 시. 나는 그 뒤로 보물찾기 하듯 엄마의 시를 찾아 헤맸다. -몇 차례 성공하지 못했지만- 시는 주로 손바닥만 한 수첩이 어디서 찢겼는지 모를 낱장 종이에 적혀 있는데, 서랍 속에 꽁꽁 숨겨져 있다가 돌연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는 했다.  

일어에 능통하셨던 엄마의 글에는 따금 내가 읽기 힘든 가타카나와 한자어가 섞여 있어  뜻을 헤아리기 힘든 글도 더러 있었지만, 감정을 담아낸 서정시가 주를 이뤘고 가끔은 자연과 꽃을 주제로 한 정형시 섞여 있었다.

시를 찾아 읽을 때면 엄마의 음을 몰래 들여다보고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훔쳐 읽는 시가 밝은 감정일 때는 나도 함께 미소가 지어졌고, 시가 우울할 때는 내 기분도 우울해지고는 했다.


언젠가 시집을 내고 싶으셨다던 엄마.

엄마는 가정주부라고 단정 짓기엔 너무 많은 일을 하셨다. 자식들이 모두 등교를 마친 낮 시간에는 (혹은 밤늦게까지) 집안 살림뿐 아니라 아버지를 도와 바깥 살림까지 돌보셨기 때문에 24시간이 모자라게 바쁜 일상을 보내셨다.

그리고는 고단함을 잊으려는 듯 하루에도 몇 잔씩 커피를 즐겨드셨다. 엄마를 떠올리면 커피 향과 맛있는 집밥 내음이 함께 떠오르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커피메이커로 내린 원두커피에 설탕 한 티스푼 혹은 종이컵에 담긴 믹스 커피 한 잔. 그것들은 엄마의 피로회복제였다.

 

믹스 커피에 찍어 먹는 에이스의 맛 Photo by. 서보통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주인공 지안(아이유 분)이 지친 어깨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믹스 커피를 세 봉씩 타서 마시는 장면을 보며 나는 엄마 생각이 짙게 났다.

사무실에 놓인 신문들 속 낱말 잇기 칸을 채워가며 커피를 홀짝이던 긴 머리의 여인이.


엄마는 이따금 해태제과의 에이스 과자를 뜨거운 믹스커피에 푹 담가 드시고는 했다. 그것은 과자를 즐겨하지 않으셨던 엄마의 거의 유일한 군것질이었다.

딱딱했던 에이스에 달짝지근하고 향긋한 커피가 스며들어 촉촉한 식감으로 변하면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내렸다.

엄마는 주로 날씨가 맑고 기분이 좋은 날 이 조합을 즐기셨다. 내가 몰래 미소 지으며 읽었던 그 시들 중 몇 편은 향긋하고 달달한 믹스커피의 향을 품고 있었으리라.

엄마의 시 들은 끝내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행방 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나는 안다. 엄마는 '시인'이었고, 꿈 많은 여인이었음을.

오늘, 엄마를 따라 에이스를 믹스 커피에 찍어 먹어 본다.

달콤하고 씁쓸한 인생이 입 안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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