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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통 Nov 15. 2021

돈까스의 계절

그 해 나의 크리스마스는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바삭하고 촉촉했다.

며칠 전, 첫눈이 내렸다.

원래 가을이 이다지도 짧았었나? 

정말이지 '봄, 여어어어름, 갈, 겨어어어울'이다. 그래도 눈이 내리던 그날 아침, 창밖으로 제법 쏟아지는 눈송이를 보며 나는 또 설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다.

심한 수족냉증 때문에 겨울만 되면 손발이 차서 고생을 하고, 10월부터 수면양말을 신기 시작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겨울이 참 좋다. 정확히는 겨울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좋다.

추운 날씨와 대비되는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 롱코트와 머플러, 군고구마와 붕어빵을 제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계절. 무엇보다 겨울에는 크리스마스가 있다.


우리 집은 농기계를 하시던 아버지의 직업상 겨울이 되면 가계소득은 현저히 줄어들고, 방학을 맞은 자식들 모두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며 소비는 더 커지는 상황이 거의 매년 반복됐다.

전라도로 이사를 하고 동생들이 태어나면서부터야 그런 여유가 없어졌지만, 경기도에 살 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의 겨울철은 긴축재정의 시기가 아닌 바쁜 가을 일을 마무리하고서 누리는 휴식 같은 시기였다. 언니와 나는 트랙터며 콤바인이며 수리 마친 농기계들이 각자 주인에게 돌아가고 난 뒤 텅 빈 공장 마당 한편에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거나, 집으로 이어지던 기다란 언덕길을 미끄럼틀 삼아 눈썰매를 타고 놀았다. 

봄, 여름, 가을 계절이 늘 바쁘셨던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겨울은 언제나 행복했다.

일곱 살 무렵이었나? 그 겨울,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부모님의 손을 꼭 잡고 들어섰던 경양식집에서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날의 냄새, 온도, 그리고 돈까스의 맛까지.

-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고 묻는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하는 수밖에. 앞서 콜라와 관련된 에피소드에서도 말했듯, 나는 어린 시절을 꽤 자세히 기억하는 편이다.-

어쨌든 문을 열고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널따란 홀이 펼쳐졌다. 짙은 자줏빛을 띈 소파 형태의 의자와 테이블이 놓인 자리를 각각 나무 칸막이로 분리해 두었는데, 내부는 주황빛 전구에 의존한 차분하고 어두운 분위기였다. 

계단을 따라 내려갈수록 가게 안에 짙게 배어있던 기름 냄새와 은은한 향신료의 향기가 짙어졌다. 수프와 돈까스를 만들며 버무려진 온갖 식재료의 향은 역한 찌든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바깥의 추위를 사르르 녹여 주는 듯한 온도와 냄새였다.

지금에야 크리스마스 외식이라고 하면 파인 다이닝이나 호텔 레스토랑 같이 사한 장소도 많다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특별한 날 경양식집은 꽤나 멋들어진 선택이었다.

자리로 서빙된 수프는 고소하고 부드러운 크림 수프였고, 뒤이어 갓 튀겨져 나온 돈까스는 진한 갈색의 데미그라스 소스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한동안 유행했던 두툼한 일본식 돈까스나 겹겹이 돈까스와는 다른 적당한 두께의 적당한 크기. 전형적인 옛날 경양식 돈까스였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둥그런 접시 위에 돈까스 두 조각과 흰쌀밥, 양배추 샐러드와 통조림 콩 같은 것들이 올라가 있었는데, 바삭하게 튀겨졌던 돈까스는 소스를 듬뿍 머금고 촉촉하고 눅눅하게 변했다.

부모님이 먹기 좋게 조각조각 잘라주신 돈까스를 한입씩 포크로 콕 찍어 입에 넣을 때마다 식도를 타고 몸 안으로 겨울의 맛이 흘러 들어왔다

그 해 나의 크리스마스는 부드럽고 따뜻했으며 바삭하고 촉촉했다.

고맙게도 특별한 날 접한 맛과 향의 강렬함은 그날 맛 본 돈까스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들어주었다.

돈까스를 먹고 온 다음날의 나는 선물을 풀어보며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아침에는 항상 머리맡에 선물이 놓여 있었는데, 우리 자매는 새벽같이 눈을 뜨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포장지를 뜯어 재끼며 병아리처럼 짹짹거리고는 했었다. 바비 인형과 커다란 분홍색 인형의 집을 선물 받았을 때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엄마 산타, 아빠 산타는 우리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불 꺼진 방에 몰래 선물을 두고 나가셨을 것이다. 

조금만 추워도 어깨를 움츠리는 지금과는 달리, 어린 나에게 겨울은 결코 추운 계절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배려와 사랑을 받으며 보낸 그 시절의 겨울 일상은 고스란히 마음에 녹아 지금의 내 겨울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여전히 녹아내려 질퍽해진 땅바닥을 걸어도, 추위에 떨다 어깨에 담이 걸려도 나는 겨울이 좋은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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