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보통 Nov 11. 2021

빼빼로데이에 받는 고백은 믿지 않는다.

또다시 빼빼로데이

위대한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k. 롤링에게 엘리펀트 카페가 있었듯, 요즘 나도 나만의 엘리펀트 카페를 자주 방문한다. 카페는 몇 개월 전부터 다니고 있는 골프 연습장 맞은편에 위치해 있어 연습이나 레슨 시간 앞, 뒤로 들러 책도 읽고 글도 쓰며 자주 시간을 보낸다.

몇 발자국만 더 내려가면 화려한 디저트와 넓은 실내를 자랑하는 sns 감성의 카페도 있다지만, 이곳만큼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찾기는 어려워 나는 이곳을 내 엘리펀트 카페 삼기로 했다.  

카페 창가에 앉아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홀짝거리며 대각선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 연습장 건물 입구에 자리한 작은 편의점이 보였다.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고, 떨어진 낙엽들이 비를 맞아 마치 절여진 깻잎 장아찌처럼 바닥에 탁 달라붙어있었다.

편의점 밖으로는 다가오는 빼빼로데이를 맞아 알록달록 다양한 빼빼로가 진열돼있었는데, 그 위로 비를 막기 위해 투명 비닐을 씌워둔 상태였다.

'벌써 또 빼빼로데이구나.'

나는 과자를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평소에도 빼빼로는 잘 사 먹지 않는데, 이유를 찾자면 아마도 그건 내 지긋지긋했던 첫사랑에 관한 추억 때문일 거라고 짐작해본다.


내 첫사랑은 무척이나 길고 긴 짝사랑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중학교 때까지 무려 9년 가까이 지속됐던 일방적인 로맨스는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야 끝이 났다.

내 절친한 친구의 친척이기도 한 J.

J는 흔히 말하는 '상남자'스타일의 남자아이였다.

싸움도 잘하고, 축구도 잘해서 이성과 동성 친구들 모두에게 늘 인기 넘치던 까만 피부의 남학생.

초등학교 1학년 때 전학을 가서 친구들 사이에 녹아들기까지, 나는 동성의 친구들을 신경 쓰느라 이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꼬맹이었다. 2학년 무렵, 그 아이가 빼빼로와 함께 편지를 건네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게 먼저 호감을 표시한 건 그 아이였다(였다고 생각했다.)

이렇다 할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J가 건넨 편지에는 내 이름과 함께 삐뚤빼뚤한 글씨로 좋아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태어나 처음 받는 러브레터였다. 무려 인생 첫 러부레타!!!

그때나 지금이나 향기와 글과 조명에 약한 나는 구릿빛 피부의 그 아이가 건넨 손편지 한 장에 생전 처음 두근거림을 느꼈다.

편지에 대한 답장은 적지 못한 채 등교를 하고 나서야, 나는 그 편지가 나만을 위한 세레나데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그 편지가 나뿐 아니라 그 아이가 호감을 갖고 있던 몇 명의 여자 친구들에게 전달된 똑같은 내용의 '행운의 편지'같은 것이었음을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내 첫사랑이 시작된 후였다.

그날 이후 J가 근처에 있으면 내 신경은 늘 그쪽다. 짓궂은 장난을 치는 날에도 나는 웃어넘겼다.

학창 시절에 J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내 성적이 조금 더 좋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초등학교 고학년에 이르러서 J가 도시의 학교로 전학을 간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몇 날 며칠을 방에 틀어 박혀 눈물 콧물 쏟아냈던 기억이 난다.

J가 전학가던 날, 나는 교문 앞으로 달려가 곱게 포장한 빼빼로와 꾹꾹 눌러쓴 손편지를 건넸다.

몇 차례 부모님의 심부름을 마치고서 받은 용돈으로 구입한 빼빼로였다.

받았던 마음을 몇 년 만에 돌려주며 전학 가서도 잘 지내라고 인사를 건네고는 이제 정말 마음을 접어야지 다짐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중학교 입학 후에 J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끝난 줄 알았던 내 첫사랑에 다시 재생 버튼이 눌렸다.

급식 당번으로 배식을 맡은 날이면 일부러 김치 코너를 맡아 J가 좋아하던 이파리 부분만 덜어 준다거나, 제육볶음을 더 담아주는 것으로 에둘러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던 그 아이는 이따금 내 감정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매우 나쁜 남학생이었지만, 오래된 짝사랑은 알코올이나 니코틴처럼 강한 중독성으로 분별력을 약화시켰다.

매번 내 고백을 쿨 하게 거절하던 그 아이였지만, 나는 이후로도 약 257번쯤 고백을 건넸던 것 같다. 세상에는 100번 찍어 안 넘어오는 나무도 존재했다.

나중에는 고백하는 스스로도 이건 짝사랑이 아니라 이루지 못한 관계에 대한 미련이라는 걸 깨달을 정도였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모두가 치를 떨 정도로 지긋지긋했던 짝사랑은 내가 자유연애 시장에 뛰어든 고등학생이 되면서 가까스로 끝이 났다.

이후로 몇 차례 빼빼로데이를 기회삼아 고백을 건네 온 남자 친구들 있었지만, 나는 빼빼로 데이에 받은 고백은 한 번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일종의 트라우마였을까?

그 친구들의 마음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행운의 편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런타인 데이나 빼빼로 데이 같이 이름마저 달콤한 그런 날에 건네 오는 고백은 어쩐지 마음에 와닿지가 않았다. 나를 향한 벽하지 않은 마음을 분위기에 편승해 건네 오는 느낌이었달까...

다행인 건지, 지금의 내 남편은 무슨 무슨 데이 같은 기념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종종 그런 날 퇴근길에 간식이 들려 있다고 해도 회사에서 단체로 나눠주는 무의미한 간식일 뿐이었다.

그 어린 날, 빼빼로와 손편지 한 통에 오래도록 마음을 빼앗겼던 소녀는 차라리 삼겹살 데이를 챙기는 것이 축산 농가도 살리고 더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 삼십 대의 어른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앞 편의점에서 '오늘은 나를 사주세요'하고 손짓하는 빼빼로 더미 사이로 손을 뻗어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오독오독.

초콜릿 코팅을 입은 막대과자가 입 안에서 톡톡 부서졌다.

세월이 지나도 똑같은 그 맛을 느끼며,  시절 온 마음을 다해 짝사랑에 진심이었던 소녀의 추억을 렇게 내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팔각모 사나이와 인생 물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