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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보통 Nov 17. 2021

선생님과 딸기주스

'글 쓰는 재능'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선생님 댁은 교내 관사가 아닌 인근 동네에 위치 단독 주택이었다. 하교 시간이 지나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붉은 벽돌로 지어진 작은 양옥집 안 깊은 곳까지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살던 지역에서는 가을이 되면 지역 축제를 앞두고 문인 협회에서 주최하는 백일장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선생님께서 이 대회를 앞두고 며칠간 학생들에게 '글쓰기 특훈'을 해주셨다. 그날 오후, 나를 포함한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방과 후 선생님 댁으로 초대를 받아 방문하게 된 날이었다.

사실, 재능 여부를 떠나 매일 친구들과 놀기 바빴던 내게 글을 쓰는 일은 학교 숙제나 일기장에 대충 적어내는 하루 일기 같은 것에 불과했다. 그랬던 내가 백일장에 나가 된 건 당시 교내에서 열렸던 동시 짓기 대회에서 내 시를 읽은 선생님의 추천으로, 말 그대로 얼떨결에 나가게 된 백일장이었다.

"보통이 너는 글 쓰는 재능이 있어. 선생님은 네가 이 솜씨를 계속 가꿔 나갔으면 좋겠는데?"

글 자체를 초등학교에 입학해서야 뒤늦게 깨우친 내게 글을 쓰는 재능이 있다니...

그날, 선생님의 그 한마디는 내게 글 쓰는 재능이 있다는 '착각' 또는 '발견'을 하게 해 주었다. 

게임 속 캐릭터가 새로운 아이템을 장착하듯, 내 능력치에 '글 쓰는 재주 아이템'이 추가된 것이다.

대회를 앞두고 일주일 정도였던가? 선생님은 방과 후 시간을 이용해 우리가 써온 글들을 읽고 난 후 수정할 곳과 잘한 점 등을 콕콕 짚어주셨다. 일종의 백일장 예행연습이었다.

내가 동시를 적어간 공책에도 빨간펜으로 밑줄과 동그라미가 여러 군데 그어져 나갔다.

'시 다운 시'라고 표현 하기엔 거창 할지라도, 고작 며칠 사이 나는 '시 쓰는 재미'를 알아가는 것 같았다.

대회를 하루 앞두고 초대받은 선생님 댁에서 우리는 삼삼오오 거실 바닥과 소파에 나눠 앉았다.

선생님 댁은 상상했던 그대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가정집이었다. 마룻바닥과 하얀 벽지, 거실 테이블에 놓인 하얀 뜨개 장식까지. 작고 아담했던 선생님과 꼭 어울리는 고즈넉한 집이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거실로 안내하신 뒤, 현관 오른편에 위치한 부엌으로 향하셨다.

곧이어 커다란 믹서기가 조리대 위로 올라왔다.

"선생님이 딸기주스 만들어 줄게"

살림하는 지금 와서야 생각해보면 딸기 철이 아니었으니 딸기값이 금값이었을텐데, 선생님은 딸기를 믹서 가득 듬뿍 담아내셨다. 이어서 하얀 우유를 콸콸콸 붓고는 꿀을 듬뿍 짜서 넣으셨다.

'우리 엄마도 딸기주스에 꿀을 넣어주셨던가?'

딸기 주스에 꿀이 들어가는걸 처음 알게 된 건지, 매일 학교에서만 보던 선생님이 주방에 서 계시는 낯선 모습 때문인지 그 순간 모든 게 생소해 보였다.

'위이잉'하는 믹서 소음이 고요한 집안 가득 울려 퍼졌다.

함께 간 아이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매일 같이 학교가 떠나가라 떠들어 대던 아이들도 선생님 댁에서만큼은 얌전하고 조용한 모범생 모드였다.

잠시 후, 핑크빛 딸기 주스가 유리잔 가득 담겨 나왔다.

조심스레 건네든 주스를 한 입 가득 마셨다. 우유가 들어갔으니 느끼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내가 잠시 한 눈 판 사이 요구르트를 같이 갈아 넣으셨나?

선생님 표 딸기주스는 마치 부드러운 새콤달콤 캐러멜을 마시는 것 같았다.

언제나 우리 엄마 음식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엄마께는 죄송하지만, 딸기주스만큼은 선생님 표 주스가 넘버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너무 맛있어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긁어 마시고 싶은 그런 맛이었다.

간식 시간이 끝나고도 한동안 웃고 떠드는 시간이 이어질 뿐, 선생님의 빨간펜은 등장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작은 지역 백일장일지라도 참가 자체가 소중한 경험이라며 최선을 다하고 오라는 격려와 응원을 해주셨다. 그간 놀고 싶은 거 꾹 참고 글 쓰느라 애썼다며, 집에 가서 일찍 자고 내일 학교에 늦지 않게 집합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내일도 선생님을 뵐 것이고, 그다음 날도, 그다음 해에도 선생님을 만날 것을 알면서도 우리를 배웅해주시던 그 순간, 어째서 나도 모르게 서글픈 감정이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다음 날 지역의 대표 관광지인 읍성 안에서 백일장 대회가 개최됐다.

'가을'이라는 주제에 맞춰 시를 써서 제한 시간 내에 제출해야 다.

허나 초등학생 집중력이 어디가랴? 내 원고지는 한참을 백지상태로 친구들과 떠들고 노는 시간만 늘어났다. 이어 원고지에 글자를 썼다 지웠다만 반복하다 제한 시간이 끝나가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순간 돌담 옆에 피어난 코스모스를 바라보다가 '번쩍'하고 시상이 떠올랐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그 시의 제목은 '코스모스 길'이었다.

시 자체는 생각나지 않지만, 스토리는 단순했다. 새벽녘 자전거를 타고 신문 배달을 가던 소녀가 논 길 옆으로 피어난 코스모스를 보고 희망을 찾았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시간을 거의 다 쓰고서야 뒤늦게 원고지를 제출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빠르게 써 내려간 시였다.

얼마 후 결과가 발표됐는데, 내가 제출한 시가 '동상'을 수상했다며 월요일 조회시간에 상장을 받게 되었다.

얼떨떨했다. 베이비복스니 핑클이니 아이돌 춤을 따라 하며 대회에 나갈 줄이나 알았지, 글을 써서 상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초등학생 치고는 상당히 감성적이었던 부분이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그 시 속에 신문 배달 소녀가 '나'라고 생각하신 심사위원분의 착각 덕분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인생 최초로 글을 써서 상을 받아 들게 되었다. 남몰래 시를 쓰시던 엄마와도 공통점이 생기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잘 해낼 줄 알았다며,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셨다.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딸기주스 덕분이에요!"

선생님을 생각하면 '대상'을 타서 안겨드리면 좋았을 테지만, 사실 스스로는 동상으로도 상당히 만족해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유독 좋은 은사님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에 한 분이 내게 인생 딸기주스와 새로운 재능이라는 아이템을 선물해주신 '유지은 선생님'이셨다.

무용수도 문학인도 내 길이 아니오, 나는 먹고사는 일을 택하겠다며 '학업' 보다 '직업'을 택했던 내가 세월이 흘러 어쩌다 보니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니. (이것은 다 브런치 덕분입니다.)

인생이라는 건 참 예측 불가능한 일의 연속이라는 말이 맞는듯하다.

자주 다니는 단골 과일 가게에 '딸기'가 나오는 걸 보니, 그날의 딸기주스가 떠올라 이렇게 추억을 적어본다. 생전 연락 한 통 없던 못난 제자인지라 이제와 선뜻 연락 드릴 용기는 없지만, 선생님께서 부디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시기를. 내게 주셨던 응원처럼, 나도 진심을 담아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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