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끝에서부터의 시작.

by 보통인

D-30. 회사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회사가 나를 적응시키지 못한 건지 내가 적응을 하지 못한 건지 결론적으로는 많은 생각을 가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 개인적인 사유는 번아웃 (그게 틀린 말은 결코 아니었다). 상사들은 한 시간의 대화로 휴식기를 가지고 돌아오거나 원하는 자리를 구성해 보거나 염두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로 회유를 시도했다.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요구하고 남을 수 있었겠지만 많은 생각을 해보면 결코 좋게 남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는 판단하에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10년을 조금 채우기 못하고 마무리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D-5. 인수인계하느라 바빴다. 남은 해결 문제들, 프로젝트들을 각각의 사람에게 지정하여 어디까지 진행되고 어디까지만 하면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주고 빠졌다. 솔직히 허탈했다. 열심히 해달라고 소리 내어 요구했던 것들 같은데 막상 퇴사한다고 하니 한 30% 정도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윗선의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에 대해, 그리고 회사 생활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생각보다 영향력이 있는 듯한 나의 모습을 보며 그래도 헛일하진 않았구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내가 조금 더 노력을 해봤어야 하나 싶은 생각도 강하게 들었었다. 그러나 결정된 것은 결정된 일. 되돌아보지 않는 게 중요하다.

D-1. 퇴사 전날까지 많은 회식과 점심 약속들이 잡히고 드디어 마지막이었다. 좋은 얘기를 많이 해줘서 고맙기도 하고, 퇴사하는 사람 앞에서 싫은 소리 하는 것도 뭣하지 않나 싶어 회의적으로 듣기고 하고. 그래도 많은 얘기들 중, 한 분이 이런 생각을 가진 나에게 얘기해 줬다: 지금까지 잘해줬기 때문에 밥도 먹고 술도 마시는 거라고, 챙김을 받는 게 결국을 나 자신과 회사 생활을 돌아보게 되는 거라고. 조금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다시 흔들.

D-Day. 바보 같이 사무용 노트북을 사무실에 두고 와서 오랜만에 아침 7시에 집을 나섰다. 여유롭게 도착해서 마지막으로 회사 친구들과 커피 한잔 하고, 아홉 시부터 질풍노도의 인수인계를 진행하여 마무리하고 오후에는 팀원들과 그리고 친구들과 인사를 했다. 다섯 시쯤 돼서 사무용 노트북과 직원증을 반납하고 사무실를 뒤로 한채 저녁 약속을 갔다. 보통의 일상으로 마무리했다.

D+XX. 아직까지는 백수 신세에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쉬라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나는 구인구직 사이트를 수십 번씩 드나들고 있다. 놀러 다니라고는 하지만 마지막 월급과 퇴직금이 아까워 집에만 머물게 된다. 그래도 위로가 되는 건 후회가 없고 개운하다는 것이다. 끝이 보였고 끝을 도달했다. 이젠 곧 다시 시작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퇴사를 하게 되면 사람들의 질문이 많아진다. 어디 이직을 하냐, 왜 그만두게 되었냐, 그냥 조금만 더 있으면 횟수도 채우고 연말까지는 휴가도 제대로 챙기지 않겠냐 등등. 왜 그만두게 되었냐는 질문에 표면적인 이유는 번아웃이고 계기가 된 이유는 상사와의 개인적인 마찰 (상사는 절대 마찰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후후)이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는 회사에서 나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었다. 금방 지쳐버리고, 끈기 없이 넘겨버리며 인내심의 한계를 매일 같이 느끼며 속으로 남 탓 하느라 바쁘고 그 과정에서 일도 팀도 제대로 챙기기 못하는 나의 이 절망스럽고도 애처로운 모습에 나는 슬퍼졌다. 변화 속에 발전이 있고, 의결 조율이 있고, 미래의 수많은 희망적인 회의들과 팀원들의 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웠다. 그래서 그만두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남겠다는 갈등이 없었던 건 아니다 (수개월간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시기를 보면 다소 충동적인 타이밍이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지금이 아니면 절대 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질러버린 것이다. 만약에 조금만 더 있었다면 다시 ‘조금만 더’를 생각하고 어쩌면 퇴사 황금 시기를 놓치지 않았을까 싶다. 이직을 결정하고 퇴사한 것 또한 아니다 - 오랜만에 커리어에 대한 갈등과 고민을 겪으면서 풀타임으로 이직준비를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같은 업계를 갈 것이냐 새로운 곳으로 갈 것이냐. 동일한 업무를 할 것이냐 새로운 업무를 찾아볼 것이냐. 많은 질문들에 대해 답도 해야겠지만 이력서를 넣고 기다리고 면접을 보는 것에 재미를 아는 지금이 사실 이직을 제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다음 페이지를 적지 않았다.


어쩌면 변화가 필요했던 내가 사랑하는 회사와 애정하는 팀원들 때문에 지금까지 그냥저냥 끌고 왔던 것 같다. 하지만, 고인 물은 썩게 되는 법. 그리고 그 물을 썩게 하는 나 자신이 원인이라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 새로 들어올 변화의 바람은 매우 긍정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다시 얘기하지만 정말 진지하게 커리어를 생각한다면 나와 정반대로만 하는 것이 좋다 (항상 바로 이직하고, 승진과 연봉 협상을 염두에 두고, 회사 환경이 나 자신을 위해 좋게 형성되어 있다면 유지!). 그러나 인생을 살아갈 것이라면, 내가 추구하는 직장인으로서의 방향은 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 톱니바퀴가 되더라도 자기만족이 있는 부품이 되고 싶다. 부품이 고생해 가며 다듬어져야 되는 것들은 많고 고통스럽지만... 희망적인 마음으로 요즘 나를 다스린다. 조만간 준비된 나 자신을 제대로 무장하여 다시 취업의 전선으로 뛰어들고 회사라는 전쟁터로 향할 것이다.


언제 다시 취직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 시간을 소중히 하라는 많은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 당분간은 열심히 하고 싶었던 것들을 차근차근해보고자 한다. 밀린 책들도 쌓아 다 읽고, 글도 조금 더 열심히 쓰고, 다이어트도 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어쩌면 놓쳤던 삶의 일부를 나는 오늘 쟁취할 수 있던 것이니까, 허투루 쓰지 않게.


아직은 백수인.

오늘도 普通인.

내일은 다시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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