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도시 산책.

걷기라는 명상

by 보통인

코로나 블루라고 했던가. 우울함에 허덕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채 일 년의 시간을 무의미한 TV 시청과 먹는 것으로 풀어버린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렇게 또 한 해를 보내버린 것에 대해 한탄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뭔가 얻어가는 한 해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되새기며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또 한 번의 폭식으로 저녁을 보내고 로맨스 소설에 빠져 열심히 한편씩 읽어 내려가던 오늘 (로맨스 소설만큼 사람의 감정을 불태우는 것도 없는 것 같다!) 안 되겠다 싶어 마음을 먹고 밤 열 시에 집을 나서 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도시 산책을 해보기로 했다. 야간에 영상을 겨우 웃도는 온도를 느끼며 청담부터 도산공원 부근까지 쭉 걷고 와보니 어쩌면 올해 가장 크게 얻어가는 건 산책이라는 명상 방법이 아닌가 새삼 깨달았다.


심심치 않게 걷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가끔씩은 정말 목적을 가지고 3 - 4시간씩 걸어 지쳐버리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굉장히 귀찮아하기도 하는 나를 보면 언제 가장 자주 산책을 생각하고 실행하는지 보면 주로 마음이 허하고 공허할 때인 것 같다. 집을 나서면서 다양한 산책로를 탐험하는 걸 좋아하는 데 제일 먼저 온 몸으로 실감하게 체감하게 되는 건 역시나 풍경의 변화이다. 한 동네에서 약 20년 정도를 살아오다 보니 (후아, 이제는 정말 국내 생활이 길어져버린 요즘이다... 언제 다시 나가지) 변해버리는 가게들과 높아져버리는 건물들,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에 어렸을 적을 생각하게 된다. 순수하고 밝았던 나의 어린 시절부터 사춘기를 보냈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닫고 회사 생활을 하는 나의 모습이 다시 믿기지 않는다는 것을 되뇌다 보면 어느새 현재에 도달하게 된다.


현재를 생각하게 되면 역시나 인간관계가 중점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 아버지와 어머니의 건강이 신경 쓰이고 형부와 어린 조카들이 꽁냥 거리는 게 부러우며 언니들과 동생의 행복을 빌게 된다. 중학교 친구들이 걱정되기도 하고 고등학교 친구들이 반갑기도 하며 대학교 친구들이 연락이 끊긴 것에 대해 아쉬워하기도 하고 회사 사람들에 대해 다시금 존경과 질투와 동경을 음미하게 된다. 어쩌면 지금 일이 가장 중요한 시기에 사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아무리 일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결국은 같이 끌어가는 팀이 있음에 감사하게 되고 누군가를 따라가고 이끌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통해 막중한 책임감을 지게 되는 것도 있다. 오늘의 나를 생각하다 보면 내일의 나는 어떨까 꿈을 꾸게 된다.


미래를 생각하게 되면... 조금 우울하다. 뭔가 희망적이거나 꿈을 꾸는 게 없다는 데에서 오는 허무함도 있겠지만 결론적으로는 미래를 생각하게 되면 나에 대해서 그리고 나의 존재에 대해서 더욱 강렬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미래에도 지금처럼 돈을 벌고, 안정감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 나는 지금의 상태로 애인을 두고 살 수 있을까 아니면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한때는 예쁜 3층 건물에 공방과 책방과 집을 두고 살고 싶어 했는데 이 건 몽상에 불과한 것일까? 어쩌면 코로나 블루, 무기력함이 찾아오는 이유는 나 자신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속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참 재미있는 건... 나도 이젠 그걸 관리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씻으며 문득 생각난 노래 한 구절을 계속 흥얼거리게 되었다 "나에게 넌 허무한 별빛, 너에게 난 잊힌 길, 이곳에서 우린 변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었지." 어둠이 자욱하게 깔린 곳에서 도시의 별들이 반짝이고 반달이 하늘 높이 풍경화처럼 그려진 오늘. 나는 허무함과 잊힘을 안고 그렇게 기나긴 산책을 했다. 그렇게 TV와 폭식으로 극복하려 했던 어두운 내면의 외로움은 이제는 책의 한 페이지를 읽고 동네 한 바퀴를 걸으며 풀어내려고 하는 나를 보면 나도 어른이 되었구나 싶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나도 이젠 30대 - 어렸을 때 그렇게 동경하던 나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과거의 나에게로 돌아가 나는 얘기해주고 싶다 "야! 30대 별거 없더라. 그래도 내일 외롭고 힘들면 동네 한 바퀴 걷고 와. 많은 생각을 하고 조금은 행복해질 거야."라고.


그렇게 난 어른이 되었다.

산책으로 소소한 평화를 찾을 수 있는 어른이.


오늘도 普通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