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실전MBA] 연재칼럼
*조선일보(20121018)에 실린 연재기획 <안병민의 실전MBA> 칼럼입니다.
삼장법사와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 판타지 소설의 원조격인 서유기(西遊記)를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것은 다양한 캐릭터의 조화이다. 손오공은 매번 요괴들을 물리치지만, 틈만 나면 팀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반면 삼장법사는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손오공을 비롯한 말썽꾸러기들을 다독이며 머나먼 천축국으로의 길을 재촉한다. 남성성을 상징하는 손오공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삼장법사는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지만, 결국 불경 획득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한다. 이질적인 요소들이 결합해 창출한 시너지다.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 맞은편 율촌빌딩 1층에 위치한 '현대차 에스프레소 1호점'. 여느 커피숍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무심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깜짝 놀랄 풍경이 펼쳐진다. 매장 안에 여러 대의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와 커피전문점 커피빈이 함께 만든 복합 매장이다.
평생 가야 몇 번 찾지 않는 자동차 매장, 문턱이 높은 것도 아닌데 괜히 부담스럽게만 느껴지던 자동차 매장이 커피 전문점 특유의 커피 향과 함께 감성을 제공하는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자동차 회사 입장에선 훨씬 친근하게 잠재적인 고객에게 다가감으로써 브랜드를 한껏 노출하고, 고객 충성도를 높일 수 있다. 커피숍 입장에서도 밑질 건 없다. 최신 자동차들이 전시된 세련된 공간이라는 차별화된 이미지를 고객에게 선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와 커피라는 요소가 만들어낸 퓨전(fusion)의 현장이다.
컨버전스(융합) 시대의 기업 경쟁력은 이제 이종(異種) 산업과의 협력에서 나온다. 지난 5월 애플의 수장 팀 쿡과 이탈리아의 명차 페라리의 CEO가 만났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만드는 전자 회사와 자동차 제조 업체의 만남. 이 또한 지금까지의 상식에 비춰볼 때는 매우 이질적인 조합이다. 전문가들은 "애플이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을 내놓았다. 타임지는 올 초 "애플이 스마트폰과 자체 콘텐츠를 결합한다면 자동차 산업에서 3~5년 내 지각변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브라질에서 2012 상파울루 여름 패션위크(fashion week) 행사가 고철 처리장에서 진행되었다는 소식은 퓨전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다. 런웨이(패션쇼 무대)와 고철 처리장의 조합. 이종교배는 이제 대세다.
세상은 바야흐로 '액체사회(liquid society)'로 변화하고 있다. 동종 업계 내에서의 경쟁뿐만 아니라 타 업종과의 경쟁 또한 치열해지면서 업종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그래서 액체처럼 용해되는 사회라는 뜻이다.
이젠 누가 경쟁자인지도, 또 앞으로 누가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어제 어깨 걸고 같이 제휴하던 동지가 오늘 나의 심장을 겨누고 비수를 날릴 수도 있다. 최대의 공포는 막막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공포 영화를 보면서 가장 무서운 장면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끔찍한 장면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출현하기 직전이다.
나이키의 경쟁자가 아디다스나 리복이 아니라 전자 업체인 닌텐도가 되고, 같은 전선에서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은 적과 동지의 개념이 혼재된 전쟁터에서 '신(新) 삼국지'를 연출하고 있다. 방향성 없이 열심히 일만 하면 되는 근면성이 경쟁력이었던 시대가 지나고, 톡톡 튀는 창의력이 주목받고 있다. '시장점유율'이 아니라 '시간점유율'이 더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도 크게 바뀌고 있다. 업계의 경계를 스스로 허물고 전(全) 방위적인 경계 태세를 갖추는 것, 지금까지는 전혀 상관없던 이종(異種) 산업과의 창의적 연계를 통해 차별화를 확보하는 것, 그리고 그 시너지를 통해 고객에게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는 것, 그럼으로써 고객의 시간과 삶을 더 많이 점유하는 것이 그것이다. 컨버전스 시대의 경영 전략은 이렇게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성공적인 이종교배의 결과를 만들어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반드시 자신의 강점 분야를 갖고 있어야 한다. 자기 기업만의 차별화된 핵심 역량이 있어야 다른 기업과의 밸류(value·가치) 네트워킹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서로 가치를 주고받는 네트워킹은 호혜(互惠)의 계(契) 모임과 다를 바 없다. 내가 내놓을 게 없으면 참여하고 싶어도 그 모임에 들어갈 수가 없다.
둘째, 창의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탄탄한 내 실력이 기본 재료라면, 창의적 상상력은 다양한 맛을 내는 소스라고 할 수 있다. 기본 재료를 갖고 새로운 맛을 내려면 소스는 많을수록 좋다. 창의적 아이디어, 창의적 인재, 창의적 리더, 창의적 기업 문화가 모두 소스이다. 이런 소스들로 빚어내는 새로운 요리가 바로 창의적인 고객 경험이다.
끝으로 고객을 사랑하고 경쟁자를 존중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고객이 아닌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은 기업가가 아닌, 한낱 장사꾼의 욕심일 뿐이다. 선의후리(先義後利), 즉 의로움을 앞세우면 이익은 따라온다는 마음가짐이 창의적인 이종교배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결국 기업은 고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보통마케터안병민
*조선일보 20121018 http://bit.ly/TvNTnU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관리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많다>, <그래서 캐주얼>,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