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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심야 데이트

한경비즈니스 제 784호 (2010년 12월 15일)에 게재되었던 졸고입니다. 어버이날을 되새기며 이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예전 글, 다시 꺼내어 곱씹어봅니다. 물론 이제는 일흔을 훌쩍 넘기신 아버지와 뵐 때마다 진한 포옹을 나눕니다^^.


정말 무서웠다. 천둥 같은 호통과 추상같은 눈 부라림이면 얼어붙은 듯 제자리에서 꼼짝을 못했다. 그랬다, 내 어릴 적 아버지는 정말 무서운 분이셨다. 숫자들을 귀신같이 기억하시고 예의범절을 강조하시던 아버지에게, 비록 똑똑하단 얘긴 좀 들었지만 이런저런 사고뭉치였던 뺀질이 아들은 참 많이도 혼났었다. 하지만 그런 아들을 속으로는 끔찍이도 아껴 주셨다는 걸 나이를 먹으면서 차차 알게 되었다.


해마다 입시 때면 수험생들의 합격을 기원하는 부모님들의 기도에 마음이 찡하다. 벌써 오래 전 이야기지만, 내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던 고3 시절. 고3으로 진급하면서 나는 밤 10시 공식 야간자습이 끝나도 밤 12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비장한 각오였다. 심야의 학교는 TV나 침대, 야식, 친구 등 유혹의 요소들을 뿌리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라는 판단! 그 판단의 당사자인 스스로를 대견해하던 중 문제에 봉착했다. 바로 교통과 안전 문제였다. 당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거의 산 중턱, 아주 외진 곳에 있었기에 그 시간에 거길 혼자 걸어 내려와 버스를 탄다는 것이 까까머리 고등학생에겐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아버지가 있었다. 사업을 하시던, 그래서인지 술을 많이 드시고 또 즐겨하시던 아버지가 나의 이 고민에 흔쾌히 화답하셨다. “시험을 치는 그날까지 오늘부터 밤 12시에 내가 매일 학교로 데리러 가겠다.” 나는 아버지의 그 선언 이후 아버지의 밤시간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를, 나중에 내가 술을 먹는 나이가 되어서야 알 수 있었다. 그 날 이후 매일 밤 12시면 나를 데리러 학교로 오셨던 아버지는 친구와의 약속, 비즈니스 미팅 등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들과의 심야 데이트 약속만은 그 해가 다 가도록 한번도 어긴 적이 없으셨다.


큰 아들은 서울대 법대를, 작은 아들인 나의 아버지는 서울대 경영대를 보내고 싶으셨던 할아버지 때문에 삼수까지 하셨던 아버지-비록 그 뜻을 이루진 못하셨지만-는 정작 당신의 아들이 전공을 선택할 때에는 법대, 의대를 강권하지 않고 아들의 의견을 존중해주셨다. 뿐만 아니라 졸업 후 광고회사라는, 어른들께는 다소 생소했던 회사에 입사할 때에도, 그리고 벤쳐붐과 인터넷 열풍이 일면서 당시로서는 듣도 보도 못 했던 작은 회사로 이직할 때에도 “알아서 고민하고 결정했겠지” 한마디로 당신의 아들에게 무한신뢰를 보여주셨던 아버지.


그 후 군에 입대하여 한창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때, 면회가 안 되는 날에도 한번씩 부대 근처까지 오셔서 행여 아들이 보일까 부대 담벼락 철조망 주위를 서성이셨던 내 아버지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방학이 되면 고향집에 가서 한 학기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할아버지, 할머니께 밤새 미주알고주알 고해 바쳤던 속정깊은 효자셨고, 지방 신문 신춘문예에 입선도 하셨던 섬세한 글쟁이셨고, 큰 성공은 못했지만 경영을 전공하신 사업가셨고, 풍류를 즐겼던 호방한 술꾼이셨고, 그래서 가정적이진 못 하셨지만 심지 굳은, 또 이 못난 아들을 전적으로 믿어주고 살펴주신 나의 등대셨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신다. 불현듯 아버지를 한번 안아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한 3, 4년 전쯤이던가. 사랑하는 사람을 포옹하면 세상을, 아니 우주 전체를 안고 있는 듯한 행복한 느낌! 아버지와도 그 진득한 사랑과 존경의, 행복한 체온을 나누고 싶었다. 해서 명절 등 부모님이 계신 부산에 갈 때면 항상 하는 다짐. ‘이번에 내려가면 아버지를 꼭 한번 안아드리자. 그 동안 제대로 표현 못한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포옹으로 표현해야지.’ 그러나 감정 표현에 서툰 무뚝뚝한 경상도 출신의 못난 아들은 항상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치곤 후회 속에 다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러다 때마침 찾아온 좋은 기회. 이제 고백하건대, 이 글은 이번 설에 있을 부자간의 진한 포옹을 위해 만천하에 공개하는 나의 약속이자 사전예고다. ⓒ보통마케터안병민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관리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많다>, <그래서 캐주얼>,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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