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실전MBA] 연재칼럼
*조선일보에 실린 연재기획 <안병민의 실전MBA> 칼럼입니다.
"마케팅? 그거 사기 아냐? 필요도 없는 걸 가지고 사람 꾀어서 결국 물건 팔아먹는 거잖아."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마케팅에 대해 물어보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마케팅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진 요즘에는 듣기 힘든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이 마케팅을 오해하고 있다. 지금까지 마케팅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은 필자가 볼 땐 '마케팅'이란 녀석이 불쌍할 따름이다.
◇마케팅은 짬짜면 같은 것
우리는 중국집에 갈 때마다 늘 고통스럽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숙제! 짜장면을 먹을 것인가, 짬뽕을 먹을 것인가의 문제는 항상 우리를 갈등과 번민의 늪으로 내몰았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이야기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결코 밀리지 않는 화두라고 볼 수 있다. 이 고통을 한 방에 해결해 준 것은, 두 가지를 함께 먹을 수 있는 '짬짜면'이었다.
어디 이뿐이랴. '양념 반 후라이드 반' 치킨 또한 그런 맥락이다.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육가공 업체인 선진포크는 최근 '반반팩'이란 이름으로 한 팩에 삼겹살과 목살 등 돼지고기 두 종류를 함께 포장하여 상품으로 출시했다. 많은 사람이 이 상품으로 더 행복할 수 있음은 불문가지다.
조금 돌아왔다. 묵직한 돌직구를 바로 던지자면, 마케팅이란 '고객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고객의 불편한 점, 힘든 점, 어려운 점을 찾아 그걸 해결해 줌으로써 고객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마케팅의 본질이다.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상품이나 서비스, 이른바 히트 상품을 잘 살펴보면 예외 없이 우리의 고통과 고민, 고충을 해결해 주는 요소들을 갖고 있다. 마케터가 고객의 친구이자 도우미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고객을 사랑해야만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이 보인다. 그들의 삶에 돋보기를 대고 무얼 힘들어하는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세심히 들여다볼 때 그들의 고충이 눈에 들어온다.
말쑥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예스(Yes)'와 '노(No)'로 끝없이 이어진 미로의 문 앞에 서 있다. 그때 흘러나오는 내레이션. "가입한 보험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러자 '노'가 적힌 문으로 향하는 남자와 함께 오버랩 되는 목소리. "정확한 보장 내용을 알고 있다.", "매월 납입하는 보험료를 알고 있다." 그때마다 남자는 '노' 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나오는 마지막 카피. "'노'라고 대답했다면 그것은 당신이 아닌 보험의 잘못. 필요 이상 복잡하고 어려웠던 대한민국 보험, 원점에서 시작한다"라는 음성이 자막으로 이어지며 끝이 난다.
최근 TV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대라이프의 광고다. 그렇다. 보험, 너무 어렵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가입은 하지만, 보험료가 얼마인지, 보장 내용이 무엇인지, 너무나 복잡한 상품과 어려운 약관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늘 찜찜하다. 적지 않은 돈을, 짧지 않은 기간 내면서도 나중에 보면 보장되지 않는 것은 뭐가 그리 많은지. 화가 나지만 어쩌랴. 약관에 다 쓰여 있었다는데. 고객의 고통이자 고충이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해주겠다니 눈길이 간다. 이 보험사는 고객이 가장 많이 찾는 '핵심적'인 보장 내용을 중심으로 암보험·어린이보험 등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단순'하고 '규격화'된 보험 상품들을 출시했다.
◇눈썰매장 무빙웨이와 정원 같은 병원
'넘버 원이 아니라 온리(only) 원'이라는 말로 차별화의 중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하고 있는 요즘이다. 하지만 이런 차별화 포인트도 바로 고객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려는 마음에서부터 출발한다. 눈 내리는 겨울, 아이들과 함께 간 눈썰매장. 그런데 신나게 내려올 때와는 달리 다시 올라가는 게 만만찮다. 처음에는 괜찮지만 한두 번 계속되다 보면 꽤 힘들다. 그런데 옆에 보니 '무빙웨이'란 게 있다. 타고 내려온 튜브를 고리에 거니 마치 리프트처럼 슬로프 위까지 쭉 끌고 올라간다. 최첨단 기술이나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건 아니었을 터. 고객의 고통과 고충을 발견해내고 이를 해결해주려는 마음 씀씀이가 만들어 낸 차별화 포인트다.
최근엔 병원을 지을 때에도 고객, 즉 환자를 먼저 생각한다. 깨끗하지만 차가운 느낌 때문에 왠지 환자의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했는데, 그런 병원 특유의 분위기가 이제 사라지고 있다. 천장을 유리로 마감해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게 하고, 마치 숲 속 정원에 온 듯 내부를 꾸미는 식이다. 관동의대 명지병원은 이른바 '그린 & 에코'라는 콘셉트로 지어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고객 중심의 착한 마케팅으로
동반성장과 상생을 표방하는 자본주의 4.0의 시대, 이제 경영과 마케팅도 사람을 향한 따뜻한 온기를 뿜어낸다. 숨을 곳도, 숨을 수도 없는 소셜 환경에서 지속 가능 경영을 위한 단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사람'이다. 진정성을 바탕으로 고객의 영혼을 감동시켜야 하는 마케터의 시선은, 그래서 고객을 향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불황의 터널. 많은 기업에 힘든 시간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올해다.
살아남으려면 마케팅 개념의 재정립은 필수다. 고객은 더 이상 설득이나 공략의 대상이 아니라 행복하게 만들어 줘야 할, 그래서 감동시켜야 할 대상이다. 고객은 이제 제로섬게임의 파트너가 아니라 윈윈 게임의 파트너다. '착한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만 구매하려는 '착한 소비자'들의 시대에 기업이 가야 할 길은 고객의 어려움을 해결해줌으로써 이루어 내는 '착한 성공'이다. 이제 마케팅은 착해야 한다. ⓒ보통마케터안병민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관리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많다>, <그래서 캐주얼>,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