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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칼럼 010] ‘나다움’을 허락하라

[동아비즈니스리뷰(DBR) 연재] 안병민의 숨은 경영 찾기

*동아비즈니스리뷰 2018. 7월 254호에 실린 <안병민의 숨은경영찾기> 연재칼럼 입니다. 


<‘현대판 코르셋’ 여학생 교복>. 얼마 전 제 눈에 들어온 신문기사 헤드라인입니다. 여고생들이 입는 교복의 사이즈가 초등학교 5학년생들이 입는 아동복보다 작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교복 길이가 아동복보다 무려 8.5cm나 짧다고 하니 우리나라 여고생들은 온몸을 교복에 꽁꽁 묶인 채, 그렇지 않아도 힘든 학창시절을 고통스럽게 견뎌내고 있었던 겁니다. 


물론 생각이야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교복의 장점도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교복이 최선이라는 생각에는 부정적입니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내야 할 우리 아이들을 붕어빵 굽듯 획일적 기준으로 찍어내는, 창의성 계발의 걸림돌이란 생각 때문입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나다움’을 잊게 만드는, 기계적 도구 생산의 메커니즘이란 생각 때문입니다. (통제와 감시를 목적으로 한 교도소를 모태로 한 학교 건물의 몰개성적인 건축 디자인도 같은 이유로 반대합니다. 수많은 공포 영화들의 단골 배경이 왜 학교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짚신을 신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봄기운에 눈 녹듯 짚신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 자리를 대체한 게 고무신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나하나 짚을 엮어 만들었던 짚신은 똑같은 게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계로 찍어내는 고무신은 균일한 품질에 동일한 사이즈로 대량생산됩니다. 키보드와 손글씨도 마찬가지입니다. 펜으로 종이에 글을 쓰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요즘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기계식 키보드를 통해, 혹은 터치식 전기자판을 통해 글을 씁니다. 필압을 담아 꾹꾹 눌러쓴 개성적인 필체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입니다. ‘나다움’의 부재이자 ‘나다움’의 실종입니다. 어느 누구와도 다른 ‘고유명사’로 세상에 태어났음에도 우리는 점점 어슷한 ‘보통명사’로, 비슷한 ‘일반명사’로 바뀌어 갑니다. 대체가 불가능했던, 세상 유일했던 나만의 특성은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내 삶에 있어 내가 없는 날들이 그렇게 이어집니다.


이 모든 게 ‘효율’이 만들어낸 변화입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가 효율을 지향하며 만들어왔던 변화입니다. ‘속도’가 중요하던 그 시절을 우리는 그렇게 ‘나를 지우며’ 살아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길들이며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하지만 바야흐로 4차산업혁명의 세상입니다. 이제 중요한 건 속도나 효율이 아닙니다. 창의, 상상, 독창, 개성, 용기, 도전 등 ‘다름’을 만들어내는 요소들이 경쟁력인 세상입니다. 수많은 경쟁브랜드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차별적 가치’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차별적 가치라는 건 다른 게 아닙니다. 고객이 나를 선택해야 할 이유가 바로 차별적 가치입니다. ‘무엇이 다르길래 고객이 내 브랜드를 선택해야 하나?’가 포인트입니다. 핵심은 역시 ‘나다움’입니다. 이게 없으니 내 브랜드 또한 시장에 나가면 ‘그 나물에 그 밥’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차별화의 반대, 즉 ‘동일화’의 길로 내달립니다. 동일화는 마케팅에 있어 가장 비효율적인 경쟁 방식입니다. 그 틀에 갇혀서는 결코 차별화의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틀을 깨고 나와야 됩니다. 문을 박차고 나와야 합니다. 혁명적 변화의 세상에서 남들과 같은 방법으로는 절대 제대로 된 혁신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앞서 언급한 ‘나다움’의 실종은 결국 우리 일과 삶에 있어 ‘차별화’의 실패로 귀결됩니다. 더 나아가 창의혁신의 실패로도 이어집니다.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세상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창의성이 중요해진 배경입니다. 개성과 긍정, 재미와 몰입이 창의성을 빚어냅니다. 내가 재미있는 일을 할 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나만의 고유한 특질에서 독창적 생각들이 피어납니다. 가장 나다울 때 가장 창의적이고 가장 나다울 때 가장 행복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나를 나로 살지 못하게 하는 타인의 시선과 내 생각을 옭아매는 암묵적 기준을 깨야 합니다. 예컨대 명문대학을 나와 대기업을 들어가고 전문직을 가져야만 성공이라는 그런 케케묵은 사고방식 말입니다.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잊고 살았던 나를 먼저 찾아야 합니다. ‘믿음’을 버리고 ‘생각’을 가지는 게 급선무입니다. ‘당연히 그럴 거야’, 라는 막연한 믿음을 떨쳐내고 ‘왜 그래야 하지’, ‘왜 그런 걸까’,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게 내 삶의 주인 되는 방법입니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세상의 부속품으로 ‘내 생각’ 없이 그저 주어진 대로 살다 가는 게 아니라 ‘내 생각’을 통해 내가 꿈꾸는 세상을 주도적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내 삶의 주인이자 세상의 주인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도 딴 데 있지 않습니다. ‘학고창신(學古創新)’이라 했습니다. 옛 것을 배워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의미입니다.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창조’입니다. 그럼에도 과거를 배우는 데 급급하다 보니 창조는커녕 과거에 매몰되기 일쑤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삽니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찍어내듯 생산되는 공산품처럼 말입니다. 똑같은 교복을 입혀 놓은, 내 생각을 잃어버린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교복, 그럼에도 꼭 입혀야 한다면 좀 편하게라도 입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처럼 온몸을 옭아매는 그런 교복은 교복이 아니라 '족쇄'이자 '멍에'일 뿐입니다. 


‘주인의식을 가져라’, 많은 조직에서 역설합니다. 하지만 주인이 아닌데 의식만 주인이기는 힘듭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냥 주인으로 만들어주면 됩니다. 누군가가 정해 놓은 '기준'에 맞추어 사는 게 아니라 '나답게' 살 때 우리는 주인이 됩니다. 그러니 믿고 맡길 일입니다. 정해진 규정에 맞추어 시키는 일만 하던 '정장'의 시대는 갔습니다. 혁신을 꿈꾸는 리더라면 저마다의 개성을 토대로 한 '캐주얼'을 허락할 일입니다. 그때는 맞았어도 지금은 틀릴 수 있음을 알아야 현명한 리더입니다. ⓒ보통마케터안병민


*동아비즈니스리뷰 2018. 7월 254호 http://dbr.donga.com/article/view/1303/article_no/8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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