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통찰스케치 029]내가 감동할 수 있는 나를 찾아서

안병민의 [통찰을 스케치하다]

밀린 빨래 돌리듯 하루하루 ‘살아내기’ 급급한 날들이다.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삶이다. 그러다 보니 내 삶에 내가 없다. 허깨비 인생이다. 그 삶의 한가운데서 만난 오늘의 강의는 그래서 귀하다. <심연>과 <수련>의 저자 배철현 교수가 이야기하는 ‘나로 사는 법’이 주제다. 깨어나야 한다. 그래야 한번 사는 인생, 나로 살 수 있다.


▶통찰을 얻으려면 제대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늘 미래를 궁금해한다. ‘미래(Future)’의 라틴어 어원을 살펴보면, ‘미래’는 ‘되다(Become)’의 미래완료형이다. 다시 말해, ‘(내가) 될 것이다’라는 의미다. 미래는 ‘오지 않은 무언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될 무언가’라는 얘기다. 수동적으로 미래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미래를 만들기 위한 ‘주체로서의 나’가 녹아 있는 개념이다. 

 

깊이 보아야 한다. 그게 ‘통찰’이다. 통찰은 ‘인사이트(Insight)’다. ‘Insight’에서 ‘in’은 전치사가 아니다. 라틴어의 ‘in’은 ‘파격’과 ‘침투’의 뜻을 가진다. ‘into’의 의미다. 풀이하면, 가보지 않은 경계로 들어가는 게 ‘in’이다. ‘Insight’는 그래서 ‘깊이 보다’라는 뜻이다. 본다고 다 보는 게 아니다. 보는 것도 천차만별이다. 먼저, ‘Look’이다. ‘Look’은 그저 보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도 거리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기억나는 사람이 없다. 그저 봤기 때문이다. 그냥 봤기 때문이다. 

 

피카소가 9살 때 아버지에게 얘기했다. “이젤을 사주세요, 광장에 나가 사람을 그릴 거에요.” 피카소의 천재성을 예견했던 아버지가 얘기한다. “사람을 그리지 말고 비둘기 다리만 그려라.” 피카소는 이후 1년동안 비둘기 다리만 그렸다. 1년 후 피카소는 비둘기 다리가 너무나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됐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똑같이만 보이는 비둘기 다리들에서 미세한 차이들을 발견한 거다. 무심코 흘려보지 않고 자세히 봤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혁신도 그렇다. 똑같은 걸 보지만 남들이 못 보는 걸 보는 게 혁신이다. 경쟁은 남들과 하는 게 아니라 나 자신과 하는 것이다. 남을 이길 수 있는 전략을 갖고 있다 생각하는 건 ‘제로섬 게임’의 메커니즘이다. 내가 보고 싶은 걸 ‘깊이 봐야’ 한다. 그게 ‘Sight’다. 끝까지 보는 거다. ‘Look’은 사라지면 안 보는 것이지만, ‘Sight’는 따라가며 예의주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내가 있는 나의 세계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려던 ‘지적 게으름’을 벗어나는 기적이다. 이해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상대방에게로 옮겨가는 거다. 상대방에게로 가는 것, 이걸 종교적으로는 ‘무아(無我)’ 상태로 진입한다고 표현한다. ‘Watch’도 있다. ‘Watch’는 원래 게르만어에서 온 말로, ‘철야기도’의 의미가 있다. 깨어있어 집중하는 거다. 이를테면 강의를 듣는 게 ‘Watch’다. ‘Watch’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정해진 시공간에서 나를 없애고 상대방의 모든 것에 집중하는 행위가 ‘Watch’, 즉 관찰이다.

 

350만년 전 지구상에 엄청난 기후 변화가 닥쳤다. 나무 위가 주된 활동공간이었던 원숭이들이 나무 밑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두 가지 혁신을 한다. 첫 번째가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는 거다. 두 발로 걷는다는 건 속도가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속도가 떨어지면 사냥을 할 수 없다. 대신 특별한 능력을 개발했다. 눈의 능력이다. 사슴을 사냥한다고 가정해보자. 사람은 관찰을 통해 사슴의 움직임을 파악해서 사슴이 뛰어갈 곳에 창을 던진다. 지금 사슴이 ‘있는 곳’이 아니라 사슴이 ‘뛰어갈 곳’ 말이다. 인간이란 동물만이 눈이 앞에 있다. 다른 동물은 주의가 산만하다. 인간만이 상대방에 몰입해서 상대방처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거울신경계다. 오래 ‘관찰(Watch)’하면 상대방의 생각을 알 수 있다. 그게 바로 ‘인사이트(Insight)’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걸 과감히 추구할 수 있는 용기.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을 천재라고 한다. 1905년 스위스 베른의 특허청 9급 공무원. 그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항상 생각했다. 깊이 고민했다. 내가 원하고 내가 만족스러운 게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베를린 시내를 걷다 시계탑을 보고 엉뚱한 생각을 한다. 이 트램이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가면 어떻게 될까?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 진리이던 시절이었다. 빛보다 빠른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상식을 깨고 연구에 몰두한다. 그렇게 나온 게 특수상대성 이론이다. 세계가 깜짝 놀랐다.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이 깨진 것이다. 맞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이야기다.

 

사람들은 남을 부러워하며 남의 소리를 들으려 한다. 남이 정해놓은 룰이 맞다고 생각하고 그 규칙을 따른다. 남이 가진 걸 부러워하며 흉내를 낸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기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남’이 아니라 ‘나’에게 몰입했던 거다. 그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이유다. 남을 따라하는 건 자살행위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그 어떤 음악보다 아름답게 받아들여야 한다. 결국 관건은 자기에게 만족할 수 있느냐 여부다. 그래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과연 지금껏 나를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인생에 단 하루만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지금 이 순간, 그걸 해야 한다.

    

“제게는 아침을 시작하는 두 가지 의례가 있습니다. 7년 전, 나이 50이 되면서 인생을 독립적으로 살아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을 떠나 지금은 가평에 사는데요. 해가 뜰 때 일어나서 40분 동안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내가 오늘 해야 할 한 가지가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내가 굳이 안 해도 될 일은 무엇인가와 직결되는 화두입니다.”

 

배철현 교수는 두 번째로 달리기를 들었다. 달리기가 좋은 이유는 목적지가 있어서라고 했다. 목적지가 없는 달리기는 힘들고 허무하다. 결승점이 없는 마라톤은 완주할 수 없다. 시시포스의 형벌이다. 42.195킬로를 뛰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이다. 대부분의 포유류는 20분을 뛰고 나면 반드시 쉬어야 한다. 몸에서 나온 열을 발산시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인간은 온 몸에서 털을 없앴다. 그래서 계속 뛸 수 있다. 게다가 마라톤 30킬로 지점에서 도파민이 분비된다. 고통을 잊게 해주는 호르몬이다. 이른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목적지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갈 때 우리에게는 초능력이 발휘된다. 지금 이 순간, 나의 한걸음 한걸음이 목적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의 나의 말과 행동이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단계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수련하는 인간이 위대하다


인간의 현재상태를 ‘Self’라고 한다면 ‘개선된 자신’은 ‘Better Self’다. 경계의 기준은 ‘수련’이다. 세상 사람은 ‘수련하는 사람’과 ‘수련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뉜다.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는 사람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자신에게 감동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더 나은 상태로 가기 위한 과정이 ‘수련’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점점 늘려가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최고의 상태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뒤집었다. 이상적인 것은 현실을 통해 접근 가능하다고 갈파했다. 그러면서 얘기한 게 ‘Practice’, 즉 수련이다. 패러다임을 와장창 바꾸는 이야기다. 인간이 신이고 신이 인간이란 이야기다. 예전에는 넘볼 수 없었던 경계를 이제는 넘나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수련을 통해서 가능하단 이야기다. 더 나은 나로 수련하는 과정을 통해 현실이 곧 이상이 된다는 이야기다.

    

“예전 유학 시절 학교 성당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첼로 소리가 기가 막힐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보니 연주자가 요요마였습니다. 천 번 만 번, 아니 백만 번, 천만 번 수련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수련을 요요마는 이후로도 멈추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요요마는 점점 좋아졌을 테고 이후로도 더 좋아질 겁니다. “너의 연주는 내 작곡의도를 초월한다.”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가 요요마에게 한 얘기입니다. 수련의 힘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감동적인 자신을 찾기 위해 엄청난 일을 했다. 기원전 3만5000년경, 호모사피엔스는 프랑스 남부 아르데쉬 지방에 위치한 쇼베 동굴에 최초의 벽화를 남겼다. 유럽 전체가 빙하로 덮여있던 시절이었다. 99퍼센트의 호모사피엔스가 생존을 위해 효과적인 사냥 전략을 짜고 있을 때 나머지 1프로는 지하동굴로 내려가서 그림을 그렸다. 그게 쇼베동굴 벽화다. 쇼베동굴은 엄마의 자궁처럼 아늑하다. 당시엔 칠흑 같은 어둠만이 뒤덮여 있었을 터다. 당시 인류는 횃불을 들고 목탄으로 그림을 그렸을 거다. 평소에 생각하고 상상했던 그림을 말이다. 다들 사냥을 잘하기 위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이렇게 지하로 내려가 자신을, 나를 바라보기 시작한 거다. 예술의 태동이다.  

쇼베동굴 벽화

 
15세기 네덜란드 화가로 ‘북유럽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얀 반 에이크의 그림 <붉은 터번을 감은 남자>가 있다. 자화상이라 추정되는 그림이다. 그림 속 인물의 눈을 보면 화가이면서 귀족 계급을 쟁취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엿보인다. 그림이 담긴 액자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어 있다.  “알스 이히 칸”.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정도로 (As I can)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다. ‘현재의 내’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나’가 바로 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미래의 자신이 여기서 실현되는 사람’이란 의미다. 수련이 이를 가능케 한다.

    

“수련은 미래의 나를 그리며 오늘의 나를 전폭적으로 변화시키는 훈련입니다. 불필요한 생각과 말, 행동 등 ‘오늘 하루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쌓인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연습입니다.”


수련에는 몇 가지 단계와 개념이 있다. 먼저 직시다. 직시는 감추고 싶은 나를 바로 보는 것이다. 다음은 유기다. 굳이 내가 갖고 있지 않아도 되는 걸 버리는 것이 유기다.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연습이다. 추상이 그 다음이다. 영어로 ‘추상’의 의미를 가리키는 단어 ‘Abstract’는 ‘빼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추상은 그래서, 나에게 알맞은 한가지를 하는 것, 다시 말해 본질을 찾아가는 훈련이다. 끝으로 패기다. 패기는 나를 지탱해준다. 이런 삶의 문법과 과정을 통해 나는 ‘나다운 나’가 된다.

 

▶직시-감추고 싶은 나를 바로 보라


인간은 결국 죽게 마련이다. 인간만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 들여다보면 우리 인간은 순간을 산다. 그러니 제일 중요한 게 지금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말이 있다. 지금 이 순간을 잡으라는 얘기다. 영원 속에서 순간을 사는 우리 인간이기에 미래에 일어날 일은 믿지 말라는 거다. ‘Diem’은 ‘순간, 빛’을 의미한다. ‘Carpe’는 로마 농부들의 언어다. 감나무에 맺힌 감이 제일 맛있을 때는 떨어지기 직전이다. 그때 감을 떼어내는 데 그게 바로 ‘Carpe’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할 일이다. “지금 내가 말하는 동안에도 남을 부러워하다 보낸 세월이 저만큼 도망갑니다. 바로 이 순간을 낚아채십시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신경쓰지 마십시오.” 호라티우스의 <송가> 한 구절이다.


내게 감동적인 목표가 있고 거기를 향해 달려갈 때 ‘지금’이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그 곳은 과연 어디인가? 바로 ‘여기’다. “신발을 벗으십시오. 당신이 서 있는 그 곳이 거룩한 땅입니다.” 출애굽기의 한 대목이다. 거룩하다는 건 구별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내 공부방의 하얀 방석이 거룩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가 서 있는 일상을 돌아보라. 그 곳이 바로 거룩한 곳이다. ‘좌정’은 그 거룩한 곳에 내가 앉아 있는 행위다. 눈을 감고 하던 일을 멈추고 앉아서 하는 일이란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몰입하는 행위다. 좌정을 통해 하루의 에너지가 생긴다. 내가 감동받았을 때 일어서서 가려고 앉아 있는 것, 그게 좌정이다. 눈을 감는 건 쓸데없는 건 안 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요가는 마음 속에 일어나는 잡념을 소멸시키는 행위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쳐다보라는 의미다. 이걸 하다 보면 신념이 생긴다. 자신의 말이 그 사람 자체인 사람이 있다. 신념이 그를 그렇게 만든다. 신념의 ‘념(念)’자는 지금 ‘금’자에 마음 ‘심’자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에 몰입하는 사람이 신념 있는 사람이다. 신념 있는 사람은 세상도 바꾸고 우주도 바꾼다.

 

고대 그리스 극장은 자기 자신을 심오하게 보려고 만든 장소다. 제 3자가 되는 연습을 위한 장소다. 극장에서 중요한 건 배역이다. 기원전 6세기 소아시아 철학자인 헤라클리투스는 “개성은 인간에게 운명”이라 말했다. 우리 인간은 인생이란 무대에서 배역을 맡은 존재다. 그 연기가 감동적이려면 내가 맡은 배역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내 배역을 모른 채 남의 배역을 연기하려 든다. 내가 아닌 남을 연기하려니 감동이 없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한 가지, 그게 ‘캐릭터(Character)’다. 영어 캐릭터에는 그래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극중 인물’이란 뜻과 그 사람의 ‘개성’이란 뜻이다. 내 인생에서 내가 맡은 나의 배역은 무엇인가? 찾아야 한다. 

 

▶유기-삶의 군더더기를 버려라


유기는 버리는 거다. 버려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버려야 할까? 단테의 <신곡>에 힌트가 있다.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에 들어선다. 그런데 지옥에도 못 들어간 사람들이 즐비하다. 지옥도 거부한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누구의 칭찬도 받지 않고 누구의 욕도 먹지 않은 사람들이다. 비겁한 자들이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안 했기 때문에 그들은 비겁하다. 


필요 없이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만 알면 된다. 그게 다다. 그래서 버려야 한다는 거다.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일 말이다. 적은 게 많은 것이다(Less is More). 다시금 묻는다. 내 삶을 가장 심플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버려라, 버려야 한다.

 

▶추상-본질을 찾아라


추상을 통해 우리는 본질을 찾아가는 훈련을 한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보면 오른 손에 조약돌 하나를 쥐고 있다. 눈 여겨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다. 다비드에게는 핵심무기다. 이게 있으니 다비드는 골리앗에게 질 수가 없다. 이 유일한 한가지를 우리도 가져야 한다. 골리앗을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바로 그것 말이다. 미켈란젤로는 말했다. “내 손에는 정과 망치가 있다. 나는 이 커다란 대리석 원석에서 쓸데없는 걸 쪼아버리겠다.” 이게 창조를 빚어내는 추상의 개념이다. 


쟈코메티의 작품들에서도 우리는 추상을 읽어낼 수 있다. 자코메티는 인간의 영혼을 담고 있는 형체가 아닌, 영혼의 기본적 실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가 인간을 표현하면서 자꾸 덜어냈던 이유다. 한때 그의 작품은 성냥갑 속에 들어갈 만큼 작았다. 깎아내다 못해 사라질 정도였다고 할 만큼 형태의 무게감을 덜어내고자 노력했던 작가다. 그렇게 덜어내고 또 덜어내니 뼈대만 남는다. 그게 본질이다.

 

▶패기-내 배역에 최선을 다하라


마지막으로 패기다. 패기는 나를 지탱해주는 삶의 문법이라 했다. 중동사람들의 삶의 키워드가 ‘샬롬’이다. 아랍어로는 ‘살람’이라 한다. ‘살람’은 ‘평화’라는 뜻인데, 그 기원은 내가 빌린 돈을 다 갚을 때 오는 것이라는 의미다. 이것이 평온이다. 종교적으로는 내가 해야 할 고유한 임무를 알고 최선을 다했을 때 나에게 오는 평화, 그게 살람이다. 꾸란에 따르면, 신이 인간에게 물어본다. “당신은 일생동안 당신의 배역에 최선을 다했습니까?” 위대한 일을 했는지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알고 최선을 다했냐가 중요하다.

 

나 스스로에게 몰입하면 패기가 생긴다. 담쟁이덩굴에게 묻는다. “왜 그리로 넘어가냐?” 담쟁이덩굴이 답한다. “그게 나기 때문이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스스로에게 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신을 만났을 때 모세가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I am who I am(나는 나다).” 배철현 교수는 이를 이렇게 받아들인다. “I become who I want to be(나는 내가 되고 싶은 존재로 되어가는 존재다).” 신의 이름에 수련의 개념이 들어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수련과정에 있는 게 신적인 존재라는 의미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는 게 배교수의 진단이다. 그 질문이 이것이다. 내가 감동할 수 있는 나 자신이 있는가?

 

여러분이 그리고 싶은 여러분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리고 싶은 여러분이 여러분이 될 때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그 사람이 될 것입니다.” 강의를 마무리하는 배교수의 마지막 말이다. 어쩌면 한평생 안고 살아야 할 삶의 화두이다 싶다.ⓒ보통마케터안병민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마케팅전략연구소,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 관리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경영혁신•마케팅•리더십에 대한 연구•강의와 자문•집필 활동에 열심이다. 저서로 <마케팅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많다>, <그래서 캐주얼>, 감수서로 <샤오미처럼>이 있다. 다양한 칼럼과 강의를 통해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통찰스케치 028]빅데이터로 짚어보는 밀레니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