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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칼럼 011] 뜨겁기보다는 따뜻하고픈

[국제신문 연재] 안병민의 세상읽기

국제신문 2020년 7월 8일자 22면에 실린 <세상읽기> 연재칼럼입니다.


있어야 할 제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면 모두가 행복했을 거다. 그게 헝클어지니 사달이 났다. 불륜 그리고 배신. 배신은 복수를 낳고, 복수는 파국을 불렀다. 지난 봄, 인기리에 방송됐던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 이야기다. 기존의 드라마 문법을 깨부수는 도발적인 스토리와 그걸 '내 눈 앞의 실재'로 구현해내는 배우들의 명품연기가 몰입감을 높였다. 아니나다를까, 비지상파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28.4%)을 기록했다.


높은 시청률 이면에는 드라마를 보는 내내 가슴을 졸였던 시청자들이 있었다. 스토리라인의 진폭이 커서다. 매 순간 휘몰아치는 감정의 폭발로 숨 돌릴 틈이 없다. 보는 이의 감정 소진. 지친다는, 힘들다는 시청 후기가 이어졌다. 그래도 채널을 돌릴 수는 없다. 시선을 잡아당기는 강렬한 힘 때문이다. ‘부세계’는 그렇게,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뜨거웠다.


비슷한 시기에 방송됐던 또 다른 드라마가 있다. 누군가는 삶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삶을 마감하는 곳. 병원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다. 자극적인 이야기는 없다. 병원을 배경으로 한 의사와 환자들의 소소한 일상을 그렸다. 대학 동기인 의사 친구들의 아기자기한 우정과 사랑도 함께다. 조미료 안 친 말간 콩나물국 같은 이 드라마를, 많은 이들이 반겼다.


사실 우리 일상은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다. 별 것 아닌 오늘들이 모이고 쌓여 우리 삶이 된다. ‘슬의생’은 그런 하루하루를 담백하게 보여주었다. 드라마 같지 않은 이 드라마에 시청자들은 눈물 짓고 미소 지으며, 다음 회를 기다렸다. 이유는 단순하다. 포근하고 따뜻해서다.


‘부세계’가 뜨겁다면 ‘슬의생’은 따뜻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뜨거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따뜻한 사람이 있다. 전자가 강렬하게 타오르는 '해'라면, 후자는 은은히 비치는 '달'이다. 전자가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는 '폭우'라면, 후자는 어깨에 살며시 내려앉는 '이슬비'다. 전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쭉쭉 뻗어나가는 '직선'이라면, 후자는 주변을 헤아리며 감싸안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곡선'이다.


여러 이유로 마음이 춥고 시린 시절이다. 추위에 지친 사람들은 뜨거운 사람에게로 몰린다. 그는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한 열정의 전사다. 나의 이깟 추위야 한 방에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막상 곁엘 가보니 오래 있기가 힘들다. 너무 강하고 너무 뜨거워서다. 내 몸과 마음마저 불에 델 것 같아서다. 그를 찾았던 이유가 오히려 그를 떠나게 만드는 역설이다.


따뜻한 사람은 은은하다. 주변을 가만히 품어 안는다. 그 모습은 과장되지도, 요란하지도 않다. 그저 담담하다. 어디 있었는지 잘 보이지도 않았던 그다. 생각해보니 그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미처 못 봤을 뿐이다. 따뜻함은 곧 편안함이다. 기분 좋게 온 몸을 담그고 앉아있을 정도의, 딱 그 온도의 목욕물같은.


뜨거움과 따뜻함의 차이는 진폭에 있다. 봉우리가 높으면 골짜기도 깊다. 사람들은 높은 봉우리만 쳐다본다. 낮은 골짜기는 외면한다. 봉우리만으로 이루어진 산은 없다. 우리 삶도 그렇다. 빛이 선명하면 그림자도 짙다. 중요한 건 ‘변함없이 얼마나 오래 가냐’, 즉 일관성이다.


‘투수’ 하면 보통 ‘강속구’를 떠올린다. 두산 베어스의 투수, 유희관 선수는 반대다. ‘느린 공’의 대명사다. 평균 시속 130km가 안 되는 공을 던져서다. 그 느림보 공으로 작년까지 7년 연속 10승 고지에 올랐다. 통산 100승이 코 앞이다. 40년 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서도 대단한 기록이다. 화려해야만 스타가 아니다. 진짜 스타는 꾸준하다. 한 번 잘 하기는 쉬워도 지속적으로 잘 하기는 힘들다. 유희관은 그런 선수다. 강속구 투수를 가리키는 ‘파이어볼러’가 아니라 ‘모닥불러’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는, 별명처럼 은근하다. 뜨겁지 않다.


어느 시인이 노래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냐.” 뜨거운 사람도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따뜻한 사람들로 인해 돌아간다. 뜨겁기보다는 따뜻한 사람이고 싶은 이유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를 손꼽으며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혁신가이드안병민


*국제신문 2020년 7월 8일자 22면 <세상읽기> 연재칼럼 https://bit.ly/3iMWiYn


*글쓴이 안병민 대표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의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경영’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마케팅과 리더십을 아우르는 다양한 층위의 경영혁신 강의와 글을 통해 변화혁신의 본질과 뿌리를 캐내어 공유한다. 저서로 <마케팅 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 많다>, <그래서 캐주얼>, <숨은 혁신 찾기>가 있다. <방구석 5분혁신>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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