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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경영 24] 상놈의 혁신DNA:카뱅과 옐로우테일

안병민의 노자경영-도덕경에서 건져올린 경영의 지혜와 통찰

노자는 혁신가다. 통념을 뒤집는다. 상식을 깨부순다. 그 매혹적 전복이 통쾌하다. 도덕경 38장이 그렇다. 상덕부덕 시이유덕(上德不德 是以有德). 최고의 덕은 덕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있다. 하덕불실덕 시이무덕(下德不失德 是以無德). 낮은 수준의 덕은 덕을 놓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없다. 내세우지 않아 고수이고, 집착하니 하수이다. 상덕(上德)과 하덕(下德)의 비교는 이어진다. 상덕무위이무이위 하덕위지이유이위(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최고의 덕은 무위한다. 무언가를 억지로 하려하지 않는다. 수준 낮은 덕은 무언가를 행함에 있어 자꾸 의도를 개입시킨다. 인위적이다. 작위적이다. 덕에 대한 노자의 시각이 풀이된 이 장 역시 상식과 통념을 뒤엎는 혁신의 텍스트다. 비즈니스 차원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혁신 통찰? 집착하지 말라는 거다. 얽매이지 말라는 거다.

집착하면 굳어진다. 놓아야 자유롭다. 그런데 움켜쥐려고만 한다. 놓지 않으려 발버둥친다. 감옥에 갇힌 꼴이다. 수준 낮은 덕, 하덕의 모습이다. 상덕은 반대다. 연연하지 않는다. 과감히 비운다. 흔쾌히 버린다. 그래서 여유롭고, 그래서 자유롭다.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니 유연함이다. 유연함은 포용으로 이어진다. 다양성을 끌어안는 힘이다. '애자일'로 대표되는 비즈니스 혁신의 핵심 키워드가 여기 다 들어 앉았다.

노자형님의 눈으로 보면 카카오뱅크는 ‘놓아서’ 성공한 혁신 사례다. 막강한 플랫폼을 보유한 디지털기술기업 카카오의 금융권 진출. 처음에는 우려가 많았다. 금융 산업은 진입장벽이 높아서다. 오랜 기간 신뢰를 구축해온 전통의 금융기업들 틈바구니에서 카카오뱅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우려가 기우였음을 증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출범 1년반. 카카오뱅크는 인터넷 전문은행으로는 세계 최단기간 흑자 달성을 기록했다. 은행업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생존이 목표라고? 모르는 소리다. 카카오뱅크는 이제 시장을 주도한다. 비결은 단순했다. 집착하지 않았다는 거다. 얽매이지 않았다는 거다.

금융기업의 생명은 신뢰다. 믿음이 가야 돈도 맡길 수 있다. 그러니 금융기업은 매사 완벽해야 한다. 시시콜콜 따지며 1원까지 맞추어야 한다. 그렇게 생겨난 업무상 각종 프로토콜이 부지불식간에 신성불가침의 성역이 된다. 고객을 위해 도입했던 업무 프로세스가 고객과 따로 노는 거다. 이쯤 되면 ‘고객이 편하냐, 불편하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업무 지침에 부합하냐, 아니냐’가 관건이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버린 슬픈 이야기. 공인인증서와 보안카드로 대표되는 기존 은행 사이트에서의 짜증스러운 고객경험이 그래서 생겨난다. 사이트에 접속해 간단한 은행 일을 보려 해도 새로운 프로그램을 깔라는 메시지가 연이어 뜬다. 이걸 깔면 저걸 또 깔라 하고, 저걸 깔면 이걸 또 인증하란다. 헤어나올 수 없는 무한루프에 빠진 고객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른다. 안방으로 모셔야 할 고객을 뒷방으로 밀어낸 셈이다. 물론 은행도 할 말이 있다. 고객 자산을 관리하는 비즈니스이니 무엇 하나 허투루 다룰 수가 없어서란다. 불편하더라도 믿음직한 서비스가 낫다는 생각. 이게 금융서비스의 전형이라는 생각. 기존 은행들은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수하고 집착했다. 패착이었다.

신뢰와 편리함은 병립불가의 개념인가? 믿음직하려면 반드시 불편해야 하나? 그럴 리가 없다. 정통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던 모든 걸 버리고, 모든 걸 놓았다. 제로베이스. 카카오뱅크의 출발점이었다. 접근부터 달랐다. 목표는 행복한 고객경험. 모바일에 집중했다. 공인인증서도 없앴다. 휴대폰 인증과 신분증 촬영만으로도 계좌 개설이 뚝딱. 서비스 첫 화면은 단순하게 구성했다. 꼭 필요한 기능만 넣었다. 카카오톡의 캐릭터와 이모티콘을 활용해 재미 요소까지 더했다.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직관적인 구성. 고객이 열광했다. ‘같지만 다른 은행’이라는 브랜드 슬로건은 카카오뱅크가 제공하는 차별적인 고객경험에 맞춤했다.

놓으면 간단한데 놓지를 못한다. 버리면 쉬운데 버리질 못한다. 그걸로 지금 이 자리까지 왔으니 절대 포기해선 안 될 필승 레시피라 생각해서다. 변화가 없던 시절의 얘기다. 검증된 과거의 방식에 효과만 더해주고 효율만 더 높이면 승승장구하던 시절 얘기다. 지금은 아니다. 디지털카메라가 부상하던 그때, 코닥은 필름 R&D에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제품 혁신을 넘어 비즈니스 모델 혁신이 필요한 이유다.

시내 목 좋은 장소에 근사한 점포를 내고 제한된 영업시간동안 신뢰 가는 대면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수수료를 받는 구조. 오랜 기간 이어진, 금융기업의 비즈니스 얼개였다. 더 좋은 위치, 더 근사한 점포, 더 친절한 대면서비스 등 과거의 서비스를 '개선'하는 데 치우쳤던 기존 금융기업들은, 지금 멘붕이다. 24시간 열려있어 언제든 쉽고 재미있게,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비대면 모바일 금융의 부상 때문이다. 기존 방식을 개선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모델 자체를 혁신해야 한다. 그것도 철저히 파괴적으로.

오랜 기간 은행을 이용했던 고객에게 은행은 최선이 아니었다. 최선이 없으니 차선이라도 썼던 거다. 최악은 아니니 차악이라도 썼던 거다. 카카오뱅크는 그 틈을 파고 들었다. 기존 금융 관행에 매몰되지 않으니 만들 수 있었던 혁신이다. 수십 년간 과거를 답습하며 기존 은행들이 화석처럼 굳어져갈 때, 카카오뱅크는 정장에서 캐주얼로, 기꺼이 옷을 갈아입었다. 그래, 유연해야 생명이다.

정장의 틀을 벗어 던진 '캐주얼 혁신'으로 성공한 또 다른 브랜드가 있다. 호주의 와인 브랜드 옐로우테일이다. 와인은 어렵다. 품종과 산지, 와이너리 이름도 복잡한 데다 마시는 방식도 따로 배워야 했다. 정통의 와인이란 그런 거였다. 술 한 잔 마시는데 뭐 그리 어렵고 복잡해? 차라리 편하게 맥주나 칵테일을 마시겠다는 사람들. 와인 시장 정체의 배경이었다. 격식 갖춘 자리에서 깍듯한 예의를 갖추며 우아하게 먹는 와인. 옐로우테일은 업계의 이런 시각에 갇히지 않았다. 와인도 일상 음료처럼 편하게 마시면 좋잖아. 생산 공정과 기간을 단축했다. 합리적인 가격을 책정했다. 누구나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대중적인 맛을 장착했다. 라벨의 내용도 단순화했다. 특유의 왈라비 그림으로 친근감을 더했다. 이름하여 ‘캐주얼 와인’의 탄생. 고객은 구매로 화답했다. 전 세계 와인 중 브랜드파워 1위. 한국에서만도 연간 1백만병이 판매되는 베스트셀러 와인 중 하나, 옐로우테일이다.

'마케팅 혁신'을 주제로 카카오뱅크 임직원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기존 금융기업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은행이라기보다는 역동적 에너지가 넘쳐나는 스타트업 분위기. 형형색색 캐주얼한 옷차림엔 개성과 창의가 가득했다. 왁자지껄, 여기저기서 열정들이 피어올랐다. 움켜쥐니 경직되고, 놓아버리니 유연하다. 노자형님이 갈파한 상덕이 이런 모습일까? 날 것 그대로의 혁신 현장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우기 시작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고유의 특성을 잃고 매우 인위적으로 변해갔다. 이들은 그러한 스스로를 극복하려고도, 또 새롭게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 고대의 유령 같았다. 하지만 상놈들은 그러한 속박에서 자유로웠다.” 1888년부터 1897년까지의 격변기, 조선의 마지막 10년을 담은 책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 중 한 대목이다. 혁신은 전복과 일탈에서 나온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오늘에 집중하는 '상놈'의 혁신DNA가 절실한 요즘이다. ⓒ혁신가이드안병민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의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경영’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마케팅과 리더십을 아우르는 다양한 층위의 경영혁신 강의와 글을 통해 변화혁신의 본질과 뿌리를 캐내어 공유한다. 저서로 <마케팅 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 많다>, <그래서 캐주얼>, <숨은 혁신 찾기>가 있다. <방구석 5분혁신>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이기도 하다.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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