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강의 A는 오히려 A같지 않다는 ‘大(A)若(-A)’ 문장 형식은 노자형님의 시그니처이다. 최고의 경지는 오히려 어설퍼 보인다는 의미를 담는다. 도덕경 45장. 대성약결 기용불폐(大成若缺 其用不弊). 제대로 완성된 것은 오히려 결함이 있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작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대영약충 기용불궁(大盈若沖 其用不窮). 완전히 가득 채워지면 오히려 비어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쓰임에는 다함이 없다. 다음 문장이 하이라이트다. 대직약굴 대교약졸 대변약눌(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아주 제대로 곧은 것은 굽은 것처럼 보인다. 최고의 기교는 오히려 서툴러 보인다. 가장 뛰어난 언변은 오히려 어눌한 듯 보인다. 우리에게도 낯이 익은 문구들. 특히 대교약졸이 그러하다.
경영의 측면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은 세 가지다. 먼저 개인 성찰의 측면이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알량한 지식을 자랑하기 바쁜 이들은 초심자다. 수련이 깊어지면 무게가 더해진다. 내공이 깊어진다. 교만함이 없어 뽐내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없는 듯 있으니 사람들은 몰라본다. 대교약졸의 경지이다. 하지만 주머니 속 송곳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재능이 뛰어나거나 출중한 사람 역시 절로 드러난다. 말이 없는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지만 아름다운 향기로 인해 그 밑에 절로 길이 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수는 태산처럼 깊고 무겁다. 사람 잡는 건 늘 그렇듯 언제나 선무당이다. 대교약졸에서 자중자애를 읽는다.
짐 콜린스가 저서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에서 소개했던 여우와 고슴도치 이야기도 맥이 닿아 있다. 여우는 교활하다. 아는 게 많다. 고슴도치는 반대다. 움직임도 그렇고, 덜 떨어져 보인다. 고슴도치를 공격하려는 여우는 복잡한 전략을 궁리하며 완벽한 순간을 기다린다. 마침내 공격! 하지만 승리는 고슴도치의 것이다. 특별한 것 없다. 그저 몸을 말아 동그란 가시공으로 변신하면 끝이다. 발만 동동 구르던 여우는 이내 포기한다. 아둔해 보이지만 제대로 된 방어기술을 가진 고슴도치는, 고만고만한 수십 가지의 공격기술을 가진 여우보다 고수다. 나는 과연 여우인가, 고슴도치인가?
두 번째는 혁신의 측면이다. 혁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존속적 혁신(Sustaining Innovation)’과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다. 더 나은 성능을 원하는 고객을 대상으로 기존의 제품과 서비스를 개선하여 더 높은 가격에 제공하는 전략. 존속적 혁신이다. 하지만 과유불급. 개선에 매몰된 주류기업들은 급기야 오버(over)스펙을 빚어낸다. 원한 적도 없는 불필요한 기능들이 붙으면서 가격만 비싸지니 고객들의 입이 이따만큼 나온다. 리딩기업들이 외면했던 고객층 역시 불만은 매한가지다. 자원이 적은 파괴적 혁신 기업은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리딩기업이 간과했던 고객층을 겨냥해 적절한 기능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한다. 값싸고 단순한 제품(혹은 서비스)으로 시장 밑바닥을 공략하는 전략이다. 리딩기업은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부가가치가 낮은 영역이었다. 하지만 시장은 생물이다. 하위시장에 무사히 안착한 후발주자는 다양한 혁신 활동을 통해 기존의 강점을 유지하면서 상위시장으로 영역을 확장한다. 주류 시장의 하이엔드 유저를 겨냥한 행보다. 리딩기업들이 보유했던 기존 시장은 이렇게 파괴된다. 파괴적 혁신 개념의 골자다.
대표적인 사례는 인터넷 전화다. 초기 인터넷 전화는 가격은 저렴했지만 통화 품질이 엉망이었다. 유선전화를 쓰던 주류 고객들은 인터넷 전화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일부 초기사용자만 쓰던 인터넷 전화는 혁신을 거듭한다. 문제가 되던 통화 품질이 나아지니 가격 저렴한 인터넷 전화를 안 쓸 이유가 없다. 유선전화 가입자수의 급격한 감소는 당연지사다. 디지털카메라도 있다. 초기 디지털카메라는 해상도가 낮았다. 저장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시간은 디지털카메라의 편이었다. 저장매체가 개발되고 센서 기술이 발전했다. 디지털카메라는 개선된 아날로그카메라가 아니었다. 필름을 대체해버린 ‘파괴적 기술’에 시장은 열광했다. 더 좋은 필름을 만드는 ‘존속적 기술’에 치중했던 코닥이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다.
처음에는 엉성했다. 단점이 많았다. 기존 주류기업들은 무시했다. 비웃었다. 숨어있던 파괴적 혁신의 폭발적 잠재력을 못 보았기 때문이다. 어설퍼 보이고 우스워 보인다고 무시해선 안 된다. 대교약졸의 두 번째 교훈이다. 디지털로 인한 역량파괴적 환경변화(competence-destroying change)의 세상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필수적인 기능만 넣어 저렴한 가격에 판매함으로써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다크호스로 급부상한 샤오미. 연체료 없이 월 구독료를 받으며 비디오와 DVD를 우편으로 대여해줌으로써 시장의 절대강자 블록버스터를 벼랑으로 밀어붙인 넷플릭스. 이들 역시 기존 방식의 점진적 개선이 아니라 기존 방식의 파괴를 통한 새로운 차원의 혁신을 선택한 기업들이다.
마지막은 조직문화 측면이다. 조직마다 규정이 넘쳐난다. 사규는 빼곡하고, 업무 편람은 두툼하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 한다, 저럴 때는 저렇게 해야 한다’ 상황 별로 빡빡한 지침들이 물 샐 틈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열 사람이 도둑 하나 못 당한다. 아무리 완벽한 규정도 빈 틈이 있게 마련이다. 어느 누구도 내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 일들이 업무의 사각지대에 차곡차곡 쌓인다. 규정이 아무리 철저해도 작정하고 일 안 하려 들면 막을 방법이 없다.
해결책? 열정 넘치는 직원들의 주인의식이다. 하지만 그 놈의 규정이 직원들을 좀비로 만든다.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시키는 대로 그저 따르라 하니 뜨겁던 열정도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책임을 정해주면 딱 거기까지다. 디지털혁명 시대의 강자 넷플릭스의 ‘규칙없음의 규칙(No Rules Rules)’이 새삼 주목받는 이유다. 출근 시간? 없다. 휴가규정? 없다. 출장 및 경비 승인? 없다. 보고 절차? 없다. 넷플릭스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규칙은 이것이다. “넷플릭스에 가장 이득이 되게 행동하라(Act in Netflix's best interests).” 직원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마법의 레시피다.
차량공유 기업에서 금융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는 그랩의 창업자 앤서니 탄도 얘기했다. "우리 회사엔 'YPIMP'이라는 표현이 있다. 'Your problem is my problem(너의 문제가 내 문제다)'을 줄인 말이다. 사실 '너의 문제가 나의 문제'라는 건 '너의 성공이 나의 성공(Your success is my success)'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잡다한 규정으로 두꺼운 책을 만들어봐야 기업의 성과에는 별무소용이다. 중요한 건 조직문화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 싶다. 해가 밝게 떠있으면 촛불은 필요 없는 법이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이라 했다. 하늘이 쳐놓은 그물은 크고 성글어 보인다. 하지만 결코 그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대교약졸의 통찰 역시 그러하다. 세상 모든 걸 덮고도 남는다. ⓒ혁신가이드안병민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의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경영’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마케팅과 리더십을 아우르는 다양한 층위의 경영혁신 강의와 글을 통해 변화혁신의 본질과 뿌리를 캐내어 공유한다. 저서로 <마케팅 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 많다>, <그래서 캐주얼>, <숨은 혁신 찾기>가 있다. <방구석 5분혁신>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이기도 하다.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