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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칼럼 015] 상놈의 혁신DNA

[국제신문 연재] 화요경제 칼럼

국제신문 2021년 3월 9일자에 실린 <화요경제 항산항심> 연재칼럼입니다.


노자는 혁신가다. 통념을 뒤집는다. 상식을 깨부순다. 그 매혹적 전복이 통쾌하다. 상덕부덕 시이유덕(上德不德 是以有德) 하덕불실덕 시이무덕(下德不失德 是以無德). 도덕경 38장이다. 최고의 덕은 덕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있다. 낮은 수준의 덕은 덕을 놓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없다. 내세우지 않아 고수이고, 집착하니 하수이다. 상식과 통념을 뒤엎는 혁신의 텍스트다. 비즈니스 차원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혁신 통찰? 집착하지 말라는 거다. 얽매이지 말라는 거다.


집착하면 굳어진다. 놓아야 자유롭다. 그런데 움켜쥐려고만 한다. 놓지 않으려 발버둥친다. 감옥에 갇힌 꼴이다. 수준 낮은 덕, ‘하덕’의 모습이다. ‘상덕’은 반대다. 연연하지 않는다. 과감히 비운다. 흔쾌히 버린다. 그래서 여유롭고, 그래서 자유롭다.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니 유연함이다. 유연함은 포용으로 이어진다. 다양성을 끌어안는 힘이다. '애자일'로 대표되는 비즈니스 혁신의 핵심 키워드가 여기 다 들어 앉았다.


노자의 눈으로 보면 카카오뱅크는 ‘놓아서’ 성공한 혁신 사례다. 오랜 기간 신뢰를 구축해온 전통의 금융기업들 틈바구니에서 카카오뱅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우려가 기우였음을 증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출범 1년반. 카카오뱅크는 인터넷 전문은행으로는 세계 최단기간 흑자 달성을 기록했다. 은행업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비결은 단순했다. 집착하지 않았다는 거다. 얽매이지 않았다는 거다. 


금융기업의 생명은 신뢰다. 믿음이 가야 돈도 맡길 수 있다. 그래서 생겨난 업무상 각종 프로토콜이 부지불식간에 신성불가침의 성역이 된다. 고객을 위해 도입했던 업무 프로세스가 고객과 따로 노는 거다. 이쯤 되면 ‘고객이 편하냐, 불편하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업무 지침에 부합하냐, 아니냐’가 관건이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버린 슬픈 이야기. 공인인증서와 보안카드로 대표되는 기존 은행 사이트에서의 짜증스러운 고객경험이 그래서 생겨난다. 안방으로 모셔야 할 고객을 뒷방으로 밀어낸 셈이다. 


물론 은행도 할 말이 있다. 고객 자산을 관리하는 비즈니스이니 무엇 하나 허투루 다룰 수가 없어서란다. 불편하더라도 믿음직한 서비스가 낫다는 생각. 이게 금융서비스의 전형이라는 생각. 기존 은행들은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수하고 집착했다. 패착이었다. 


신뢰와 편리함은 병립불가의 개념인가? 믿음직하려면 반드시 불편해야 하나? 그럴 리가 없다. 정통과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던 모든 걸 버리고, 모든 걸 놓았다. 제로베이스. 카카오뱅크의 출발점이었다. 접근부터 달랐다. 목표는 행복한 고객경험. 모바일에 집중했다. 공인인증서도 없앴다. 휴대폰 인증과 신분증 촬영만으로도 계좌 개설이 뚝딱. 서비스 첫 화면은 단순하게 구성했다. 꼭 필요한 기능만 넣었다. 카카오톡의 캐릭터와 이모티콘을 활용해 재미 요소까지 더했다.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직관적인 구성. 고객이 열광했다. ‘같지만 다른 은행’이라는 브랜드 슬로건은 카카오뱅크가 제공하는 차별적인 고객경험에 맞춤했다. 기존 금융 관행에 매몰되지 않으니 만들 수 있었던 혁신이다. 수십 년간 과거를 답습하며 기존 은행들이 화석처럼 굳어져갈 때, 카카오뱅크는 정장에서 캐주얼로, 기꺼이 옷을 갈아입었다. 

마케팅을 주제로 카카오뱅크 임직원 특강을 한 적이 있다. 은행이라기보다는 역동적 에너지가 넘쳐나는 스타트업 분위기. 형형색색 캐주얼한 옷차림엔 개성과 창의가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뜨거운 열정들이 피어올랐다. 움켜쥐니 경직되고, 놓아버리니 유연하다. 노자가 갈파한 상덕이 이런 모습일까? 날 것 그대로의 혁신 현장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우기 시작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고유의 특성을 잃고 매우 인위적으로 변해갔다. 이들은 그러한 스스로를 극복하려고도, 또 새롭게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 고대의 유령 같았다. 하지만 상놈들은 그러한 속박에서 자유로웠다.” 1888년부터 1897년까지의 격변기, 조선의 마지막 10년을 담은 책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 중 한 대목이다. 혁신은 전복과 일탈에서 나온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오늘에 집중하는 '상놈'의 혁신DNA가 절실한 요즘이다. ⓒ혁신가이드안병민


*국제신문 2021년 3월 9일자  <화요경제> 연재칼럼 https://bityl.co/5u2n


*글쓴이 안병민 대표(fb.com/minoppa)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헬싱키경제대학교 MBA를 마쳤다. (주)대홍기획,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다음다이렉트손해보험(주)의 마케팅본부를 거쳐 (주)휴넷의 마케팅이사(CMO)로 ‘고객행복경영’에 열정을 쏟았다. 지금은 열린비즈랩 대표로 마케팅과 리더십을 아우르는 다양한 층위의 경영혁신 강의와 글을 통해 변화혁신의 본질과 뿌리를 캐내어 공유한다. 저서로 <마케팅 리스타트>, <경영일탈-정답은 많다>, <그래서 캐주얼>, <숨은 혁신 찾기>가 있다. <방구석 5분혁신>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이기도 하다. "경영은 내 일의 목적과 내 삶의 이유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 나가는 도전의 과정"이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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