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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 가면 쓴 삶의 무게

[방구석5분혁신.내 삶의 경영]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북한 정권이 대한민국의 문화 확산에 대한 단속과 통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심지어 남한 말이나 표현 사용도 금지하고 있지만, 단속이 잘 먹히지 않는다고 이일규 참사(2023년 11월 탈북한 쿠바 주재 북한 대사관 참사)는 말했다. 이제 북한 주민은 두 개의 언어를 쓰게 됐다. 믿을 수 있는 지인이나 가족과는 한국말을, 신고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는 평양말을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북한 주민은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 즉 두 개의 삶을 갖게 된 셈이다. 한국말 사용을 불법화해서 이제 북한 주민은 정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때는 한국말 억양과 표현을 쓰게 될 것이다. 한국말이 ‘저항의 언어’가 된 것이다. 이는 과연 북한 정권이 원하는 결과일까."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의 금일자 신문 칼럼 중 한 대목이다.


북한에서 한국말이 '저항의 언어'로 떠올랐다. 억압된 자아의 숨통을 틔어주는 '자유의 언어'가 되었다. 북한 주민들은 이제 두 개의 삶을 산다. 가족과 친구 앞에선 한국말로, 당국 앞에선 평양말로 말한다. 이중언어의 세계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가면을 바꿔 쓴다.


저항의 언어는 억압된 자아의 표현이다. 금지된 것이 오히려 더 강력한 의미를 갖게 되는 역설. 권력의 한계와 인간 정신의 회복탄력성을 웅변하는 장면이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도구를 넘어선다. 언어는 현실을 인식하는 렌즈로서 우리의 사고를 틀 짓는다. 두 개의 언어를 쓴다는 건 두 개의 세계관을 가진다는 뜻이다. 북한 주민들은 매순간 어느 세계에 발을 딛고 살아갈지 선택해야 한다. 자칫하다간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그 선택의 무게가 천근 만근 무겁다. 흔들리는 정체성. 나로 살지 못해서다.


언어와 정체성의 이중성은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북한 내 한국어와 평양어의 분열은 우리의 삶을 비추는 또 다른 거울이다. 우리 역시 일상에서 끊임없이 자아를 분할하며 살고 있어서다.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 직업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 사이를 오간다. SNS 속 나와 현실의 나도 다르다. 우리는 매일 여러 개의 얼굴을 갈아끼운다. 분열된 자아들은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공존한다.


이런 분열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다양한 자아는 우리의 삶을 보다 풍성하게 만든다. 여러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삶은 균형의 예술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과 진정한 자아 사이의 균형.


매 순간 우리는 선택한다. 어떤 말을 쓸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생각을 할지. 그 선택들이 모여 내가 되고, 내 삶이 된다. 우리의 삶도 여러 겹의 언어로 이뤄져 있다. 어찌 보면 인생은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이란 생각.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면서도 내 존재의 본질을 잃지 않는 언어. 그 언어로 써내려가는 것이 우리 각자의 삶이다. 가면 속에 숨은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 그게 바로 인생인 거다. 그래서 다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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