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5분혁신.영화읽기]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스승은 제자에게 이기는 법을 가르쳤다. 제자는 스승에게 지는 법을 알려주었다. 영화 '승부'를 통해 그려보는 스승과 제자의 마음. 단순한 승패를 넘어 삶과 정체성의 깊이를 파고든다. 조용한 바둑판 위, 치열한 영혼의 고백이다.
1. 나는 조훈현이었다.
승리가 내 언어였다.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내 바둑이 언제나 말했다. ‘나는 이긴다.’ 그 말이 나를 키웠고, 나를 지탱했다. 지는 법을 모른다는 찬사, 승리는 당연하고, 패배는 변명조차 허락되지 않는 자리가 내 자리였다. 내가 곧 바둑이었다.
그러다 그 애를 만났다. 이창호. 고요한 물 같았다. 흔들림이 없었다. 처음엔 그 눈빛이 좋았다. 내가 지나온 시간을 그 애에게 물려주면, 내 이름을 계승해줄 거라 믿었다. 그래서 데려왔다. 함께 먹고 자고, 내 머릿속을 다 꺼내 보여줬다. 내가 가진 모든 바둑을, 모든 기세를, 모든 철학을.
하지만 아니었다. 조용한 눈 속에 무서운 고집이 숨어 있었다. 그 애는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내 기풍을, 내 성정을, 내 방식의 승부를 흉내 내려 하지 않았다. 나는 불안했다. 가르친다는 건 내 그림자를 심는 일. 그런데 그 애는 내 그림자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나를 이겼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렸다.
나는 '국수'였다. '바둑황제'였다. 이겨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길을 잃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더라. 이기는 내가 사라지면, 나는 무엇인가. 그날 이후, 나는 바둑판 앞에 앉지 못했다. 승리 위에 지어진 정체성은 패배 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졌다. 내가 만들어낸 제자에게, 나는 패배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그제야 보였다. 진짜 나. 승부란, 누군가를 이기는 게 아니라 나를 견디는 일이라는 걸. 나는 다시 돌을 들었다. 다시 바둑판 앞에 앉았다. 진다는 건,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 애가 내게 준 패배 덕분이었다.
그 애는 내 자랑이다.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를 간 사람이다.
2. 나는 이창호였다.
어릴 적 나는 그분의 그림자였다. 스승님은 나의 우주였다. 말보단 눈빛으로, 침묵보단 대국으로 모든 걸 가르쳐 주신 분. 나는 그분의 손 안에서 자랐다. 그분의 수를 흉내 내며, 그분처럼 두고 싶어 몸부림쳤다. 숨결을 외웠고, 그분의 눈을 닮고 싶었다.
하지만 바둑은 모방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나는 그분이 아니었다. 나는 느리고, 말이 없었다. 내 안의 고요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른 길을 택했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 길. 그분의 바둑과는 다른 색깔의 길. 다르게 생각했고, 다르게 느꼈고, 다르게 뒀다. 스승님의 바둑은 불 같았다. 나의 바둑은 물 같았다.
그리고 그날, 내가 이겼다. 스승님을, 내 전부였던 분을, 넘었다. 세상이 내 이름을 외치던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울고 있었다. 승리의 기쁨은 찰나였고, 곧 죄책감이 밀려왔다. “죄송합니다.” 그 말이 전부였다.
스승을 넘은 것이 아니라, 그분의 시간을 빼앗아 버렸다는 죄책감에 무너졌다. 내 바둑이 인정받은 만큼, 스승님의 한 세계가 사라진 것 같은. 눈물이 났다. 정말 죄송했다. 승부란 이긴 자만의 것이 아니다. 패배한 이의 시간과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일이다. 사람을 이겨야 완성이 되는 게임이라면, 그건 너무 슬픈 승리다.
그분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다. 그러니 이긴 것이 아니다. 이끌어주신 것이다. 내가 그분을 넘은 게 아니다. 그분이 나를 밀어준 것이다. 이기는 법을 가르치던 스승이, 지는 법을 통해 나를 완성시킨 것이다.
그분은 내 스승이다. 늘 내 마음속에서, 지금도 나와 함께 바둑을 두고 계신다.
3. 승부 앞에 선 우리는, 결코 적이 아니었다.
승부의 끝.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서로를 밀어 올리는 눈빛, 그 속에 담긴 고독과 애정, 침묵으로 건네는 깊디깊은 존경이 있었다.
청출어람. '람'이 있기에 '청'이 있는 법. 스승은 제자에게 져야 완성된다. 제자는 스승을 넘어야 고개를 들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 스승과 제자는 서로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된다.
바둑은 그렇게, 인생을 닮아 있었다. ⓒ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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