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내의 기획안, AI로 날개를 달다

[방구석5분혁신.안병민의 AI로운 아빠생활]

Jul 11. 2025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AI로 가족의 일과 삶을 행복으로 채우는 어느 아빠의 실험기. 딸 시우는 여섯 살, 호기심 대마왕. 아내 서윤은 42세, 한 패션 브랜드의, 야근 많은 마케팅 팀장. 그리고 나는 40세 동화작가이자 콘텐츠 기획자. 본 연재 <AI로운 아빠생활>은 AI라는 똘똘한 비서와 함께, 딸의 상상력을 키우고 아내의 하루를 덜어주며, 가족의 일상을 작은 행복으로 채우려는 한 아빠의, 엉뚱하고 다정한 실험 기록이다. 과연 '나' 시우아빠는 AI로 더 좋은 아빠, 더 든든한 남편이 될 수 있을까?

밤 11시. 책상에 앉은 아내 서윤의 깊은 한숨. 그녀는 패션회사 마케팅 팀장이다. 책임감 강하고, 일 잘하기로 소문난 '아날로그 에이스'. 그녀의 책상 위, 신제품 립스틱 관련 시장 분석 자료와 함께 피로가 한껏 쌓여있다.

"어때, 좀 돼 가?" "아니. 한 줄 컨셉이 안 나와." 수십억짜리 캠페인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팀장의 무게. 그녀는 멍하니 시장 자료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가장 나다운 나를 만나다.’, ‘완벽한 컬러의 힘.’ 머릿속에 떠다니는 진부한 문장들에 스스로가 질려버린 표정이었다.

문득, 지난달 AI로 유니콘을 만들었던 경험이 떠올랐다. 선무당 특유의 자신감. "AI한테 한번 물어보지 그래?" 아내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기계가 뭘 안다고 컨셉을 잡아? 그냥 내가 하는 게 나아.” 그녀에게 AI는 여전히, 여섯 살 딸의 장난감 같은 존재다.

아내가 커피를 내리러 간 사이, 조용히 노트북을 열었다. 이름하여, '아내의 야근을 막아라' 비밀 작전. AI에게 자신만만하게 명령했다. '새 립스틱 컨셉 10개 제안해줘.' 결과물은? 처참했다. “놓치면 후회할 인생템!” “촉촉함 끝판왕!” 마치 10년 전 홈쇼핑 방송 같은 올드한 톤.

"아내 말이 맞았나?" 씁쓸한 실망감. AI가 뱉어낸 로봇 같은 문장들, 한참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내가 동화 원고를 쓸 때도 그랬다. 주인공에게 성격을 부여하고, 세계관을 설정해줘야 이야기가 살아나듯, AI에게도 정확한 '역할'이 필요했던 거다.

작전 수정. 다시 AI에게 말했다. "너는, 뉴욕 최고의 브랜드 전략가야. 입력해준 시장 자료를 바탕으로, 20대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신규 립스틱 캠페인 컨셉을 3가지 제안해 줘. 대표 이미지 아이디어도 함께."

몇 초 후. 모니터에 놀라운 결과가 펼쳐졌다.

1. 컨셉 A (본질주의): 가장 나다운 색, 단 하나면 충분해.

*이미지: 수많은 컬러 속에서, 오직 자신의 입술 색과 꼭 맞는 단 하나의 립스틱을 집어 드는 여성의 손.

2. 컨셉 B (자기표현): 너의 입술을 캔버스 삼아.

*이미지: 하얀 캔버스 위에 물감을 짜듯, 다채로운 립스틱 컬러가 예술적으로 펼쳐지는 장면.

3. 컨셉 C (감각주의): 바르는 순간, 공기처럼 가볍게.

*이미지: 깃털 하나가 여성의 입술에 아주 가볍게 내려앉는, 감각적인 클로즈업 컷.

기가 막혔다. 막혔던 생각을 뻥 뚫어주는, 세 갈래의 새로운 ‘길’. 출력 버튼을 눌렀다. 커피를 들고 돌아온 서윤에게 슬쩍 건넸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종이를 받아든 아내. 이내,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는 두 번째 컨셉 '자기표현'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그 아래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었다. AI가 쏘아 올린 작은 아이디어에, 전문가의 15년 경력과 노하우가 얹히는 순간.

한참 동안 종이를 들여다보던 그녀가, 마침내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그리고, 한마디. "'자기표현'이라...좋은데. 컨셉 B로 한번 밀어봐야겠어. 근데 이거, 어떻게 한 거야? 나도 좀 알려줘." 아내의 눈빛은 더 이상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유능한 팀장의 눈빛, 그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