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도 못했지만,
대학 전공을 선택하는 나를 앞에 두고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사람은 기술이 있어야 한다.'
당시엔 기술 그까이꺼 라는 생각과 함께 문과의 길을 걸었으나, 20년이 지난 지금 나의 입에서 자주 나오는 말 역시 '기술이 있어야 해'다. 그러다 취업을 앞두고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무조건 대기업을 가야 해'
대기업 가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대학 졸업을 할 때만 해도 대기업은 가뿐히 무시해줄 수 있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나였기에, 그리고 대기업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눈높이에 있는 조금 높은 계단일 뿐이라는 부질없는 망상 덕분에 소기업으로 시작해 현재도 소기업에 근무하고 있다. 중간에 중기업 정도 되는 기업에 잠시 몸담았지만, 소기업에 익숙해진 몸과 마음은 다시금 소기업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대기업을 가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싶은 건 절대 아니다. 대기업은 대기업대로, 소기업은 소기업대로 장단점이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물론 연봉이라는 모든 단점을 뛰어넘는 장점을 갖춘 곳이 대기업이긴 하지만) 나는 소기업에서 여전히 전전긍긍하고 있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참 신기해서 대기업으로 시작한 사람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직장생활을 하고, 소기업으로 시작한 사람은 소기업에 머무는 경우가 참 많다. 그래서 어른들은 기술과 대기업을 그렇게 강조하셨나 보다.
소기업 팀장은
현업과 비전 그리고 관리 사이에 고민하는 사람
아무튼, 소기업의 일개 사원을 거처 대리, 과장, 팀장, 본부장까지 이르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미생을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던데, 소기업에서 팀장은 꽤 할 일이 많다. 대기업처럼 팀이 세분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각 팀마다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기에 여러모로 한계에 부딪히는 곳이 소기업이고, 현업과 비전 그리고 관리 사이에 고민을 거듭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게 소기업의 팀장이다. 물론 나도 그렇지 못했지만, 소기업 팀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좀 해보게 된다.
1. 실무는 당연히 한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기업에서 팀장급 정도 되면 관리자의 위치로 인정받기 때문에 조금씩 실무에서 손을 떼는 경우가 많다. 그때를 기약하며 현재 넘쳐나는 실무 앞에서 각오를 다지고 있는 직장인들도 많을 테고. 하지만 이를 어쩌나. 소기업의 팀장은 관리자이면서 실무자이고 PM이다. 팀장의 직급을 달고 있지만 팀원과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나를 발견해며 자괴감에 빠지게 되는 자리가 될 수도 있고, 실무를 하는 팀장을 본받아 더욱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며 목표를 다지는 팀원들과 함께 직장생활을 하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뭐가 됐든, 실무는 해야 한다. 물론 많이.
2. 실무도 해야하고, 팀과 회사의 비전을 생각해야 한다
비록 소기업이지만 회사에서 팀장이라는 직책을 정해준 이유는 그만한 역량을 갖췄기 때문도 있지만, 그 보다 더 넓은 시각을 가지라는 의미도 있다. 그전까지는 실무만 하면 됐지만, 팀장이 되면 실무를 하면서 팀의 비전과 회사의 비전을 모두 고민해야 한다. 고민만 해서는 안된다. 고민의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할 줄도 알아야 하고, 결과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참 어렵지만, 이 모든 걸 팀장이 되기 전과 동일한 업무 시간 내에 해결해내야 한다. 결국 팀장이 되면 업무 시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3. 실무도 해야하고, 비전도 생각해야 하며, 팀원 관리를 해야 한다
'관리'라는 단어가 참 거슬리긴 하지만, 여기서 관리가 팀원의 마음까지 보듬어준다는 의미의 관리라면 그 활용이 적합하다. 세상엔 팀장 혼자 덜렁 배치된 팀도 참 많다. 그럴 경우 팀장이자 팀원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왜 팀을 만들고 팀장을 붙여 줬는지 의문이 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팀은 팀장과 팀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팀의 '장'으로서 휘하 팀원의 업무 결과를 수시로 체크해서 피드백을 주어야 하며, 팀원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속내를 들어줘야 하며, 팀원의 비전에 흔들릴 때는 (비록 팀장인 본인도 헷갈릴 때가 많지만) 어른으로서 어느 정도의 해결책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하는 게 팀장이다.
참 어렵다. 무겁다. 두렵다. 차라리 팀장이 되지 않으면 안 되나 싶다.
그러나 다행이나. 위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소기업 팀장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언제나 인력부족으로 업무 폭탄을 안고 살아야 하는 소기업으로선, 위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팀장을 만나기도, 팀장으로 성장하기도 어려운 환경이 형성된다. 소기업에서 계속 일을 하다 보면 작은 인원 때로는 혼자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팀장이 된다는 생각은 해볼 수 없을뿐더러, 제대로 된 팀장을 만나 팀장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이미지를 그려보기도 힘들다.
가끔 회사에서 여유 자금이 생겼을 때 또는 뭔가 규모의 성장이 필요할 경우 투자를 목적으로 팀장급의 인원을 채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나.. 소기업에서 제시할 수 있는 연봉은 결국 소기업 수준일 뿐, 대기업 정도의 연봉을 제시하지 못한 탓에 소기업에서 일을 해온 사람을 팀장으로 뽑을 수밖에 없다. 그런 경우, 팀장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실무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되고, 업무시간 내내 본인의 일만 죽어라 하다가 지쳐버린 나머지, 팀원이 일을 하든 말든 퇴근시간에 딱 맞춰 집으로 가버리게 된다. 결국 팀은 팀장이 있어도 팀장이 없는 것과 같은 상황에 빠져버리게 된다.
참 슬픈 현실이다.
모든 소기업이 위와 같은 상황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은 소기업도 많고, 그렇지 않은 팀장도 많다. 뛰어난 팀장이 많아 팀원들에게 제대로 된 비전을 제시해주면 참 좋겠지만, 소기업이라는 한계(다른 말로 핑계)는 언제나 높은 벽일 뿐이다.
다시 한 번, 기술을 배워야 하며, 대기업에 취업을 해야 한다던 어른들의 말씀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대기업을 다녀보지 못한 나로써는 대기업의 팀장이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말할 수 없다. (왜 슬퍼지지?) 어른들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다. 소기업에 다니는 사람도, 소기업을 창업한 사람도 마음 속으로는 멋진 회사를 만들거라는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이미 만든 사람도 있겠지만, 이 경우 양쪽(임원과 사원)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봐야 한다.
'소기업 팀장의 조건'이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어쩌다보니 '소기업의 팀장은 힘들어'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