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는 직장인(이라고 적지만, 지금 근무시간에 브런치 글을 쓰고 있는 건...?) 중에서 주말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누구나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고 있지만, 그저 꿈으로만 그쳐버리기에, 과거 한 정치인이 '저녁이 있는 삶'을 슬로건으로 내걸었을 때, 꽤 많은 사람들이 그에 환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치는 싫어도 저녁이 있는 삶은 영위해보고 싶다. 직장인이 이루고 싶은 소망을 순위로 매긴다면 아마 1위 또는 2위에 오르지 않을까.
저녁이 있는 삶을 평일에는 이뤄낼 수 없기에, 온전히 하루를, 아니 이틀을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꽉 채울 수 있는 주말을 기다리는 건, 어쩌면 직장인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힘든 5일과 자유로운 2일을 반복하는 삶 속에서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사람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살아온 공간이고 시간이기에, 저 또한 이렇게 버틸 수 있겠구나 라는 아주 작은 기대와 씁쓸한 희망을 걸어보게 됩니다. 씁쓸한 희망이라도 희망이 될 수 있으니까요.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똑같이 하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을 타고 출근과 퇴근을 연달아 닷새 동안 한 후에는 드디어 나를 위한 시간, 주말이 다가옵니다. 평일에는 하지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풀어헤치기 위해 온갖 에너지를 모으고 모아 하루를 시작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어떤 활동보다 '산책'하는 시간이 더 기다려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왜 걸으라 했을까?
꽤 많은 철학자들이 걷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볼 때마다 나도 걸어야 하는데, 걸어야 하는데, 생각만 했습니다. 걷기란 언제나 할 수 있으니 지금 당장은 다른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라며 스스로에게 변명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최근 읽은 세 권의 책이 저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 권은 작가 겸 교수의 책이고, 하나는 목수의 책이고 나머지 하나는 요리사의 책이었습니다. 세 권이 공통적으로 독자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게 있었는데 바로 자신만의 공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만의 공간을 가진다는 의미는 자신과 이야기할 시간을 더 많이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만나기 어려운 요즘 사회에서 나만의 공간은, 나를 찾고 자존감을 회복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공간이며, 그 공간에서는 그 누구도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런 공간을, 젊은 시절보다 어느덧 중년이라는 무게를 짊어져야 할 시기에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요즘에 자신만의 공간을 가진다는 건, 중산층 이하 계층에서는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합니다. 상자 같은 집이 위로 수십 개가 쌓여 있음에도 고가를 자랑하는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서 허리가 휘어지는 마당에, 나만의 공간을 가져야겠다 라고 욕심을 부리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죠. 그렇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를 '욕심'이라고 이야기하며 절약하는 삶을 위해서는 과감히 삶에서 제외해도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공간을 마련하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나의 자존감을 회복해야 하는 나이이기도 하기에
걷기를 선택했습니다.
처음엔 평일에 조금 일찍 일어나 걸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직장 생활만 십여 년을 했는데, 아직도 직장생활을 우습게 보고 있나 봅니다. 덕분에 평일 걷기 계획은 시작조차 못해보고 끝이 났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주말 아침이 되면 그 어느 때보다, 평일 알람 시간보다 일찍 저절로 눈이 떠집니다. 아침잠이 없어질 나이이니까 라고들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그때밖에 없었기에, 몸이 알아서, 마음이 스스로 일찍 일어나게 됐나 봅니다. 아직은 어두운 공간으로 새벽의 빗살이 창틈을 통해 슬그머니 내리는 그 시간의 거실은 방금 자다 일어났음에도 정신을 번쩍 들게하고 그 공간에 가득 담긴 정적과 여유를 즐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차게 만듭니다. 공간은 여유롭지만, 마음은 다급합니다. 지금 밖에 만날 수 없는, 조만간 사라질 공간의 느낌인지라 더욱 서두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서두름이 싫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아침의 그 시간에 조용히 문을 열고 혼자 걷기 시작했습니다.
차가운 공기가 맨 얼굴을 스치는 아침이지만, 차가운 공기가 상쾌함으로 여겨지며, 무거운 발걸음이 오히려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맨땅에 더 안착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평일에는 피했을 모든 것들이 산책할 때는 오히려 사소한 행복이 됩니다.
문을 여는 순간부터 내면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대화이긴 하지만, 나와의 대화인지라 말이나 표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비우고 발길이 닿는 방향을 향합니다. 지금 걷는 길의 끝에는 무엇일지 있을지 미리 고민하지 않습니다. 혹여나 돌아오는 길이 힘들지 않을까 미리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내면의 공간으로 땅의 이야기가 스며들어 옵니다. 온몸에서 사라진 여유의 흔적이 머리 위에 살짝 그려져 있는 아침 햇살로 채워집니다. 누구는 이를 사색이라고 하지만, 어려운 말은 잘 모르겠습니다.
주말, 아침, 1시간.
어찌 보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 동안 걸음으로 평일에 소모된 여유와 에너지와 자존감이 충분히 채워짐을 느낌입니다. 아마 이번 주말에도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 슬그머니 문을 열고 산책에 나서지 않을까, 그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아마 걷기에 중독이 됐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