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 했다

by 장아무개

인생에 있어서 '이성'이라는 존재에 처음 눈을 뜬 순간, 그러니까 인중을 중심으로 십여 년 동안 자리 잡고 있었던 솜털이 거뭇해지고 턱 밑에도 수염이 드문드문 나기 시작했던 그때. 듬성 난 수염이 다 자라면 어른이 되는 거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기에, 그저 까끌거리는 느낌이 좋아 계속 만지작거렸던 그 시절의 순간이 있었다. 인체의 신비한 변화를 겪는 한 편으로, 세상의 흐름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 속도, 폭을 만들어내며 변화함을 느끼게 되는 그때.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변하며 그 흔적을 애써 남겨야겠다는 보이지 않는 의지가 낙엽으로 발현되면, 소리도 없이 원래 있던 줄기에서 바닥으로 내리던 그 모습으로 나도 모르게 시선이 이동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인생의 쓴 맛은 설탕보다 쓴 소주 한 잔이 더 위로가 된다는 걸 알기도 전이었음에도, 낙엽을 보면 뭐가 그리 슬픈지, 계절이 지나는 게 슬픈 건지, 생명이 다 하여 말라 버린 그 모습이 처량한 것인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하면서, 낙엽을 보며 늦가을의 쓸쓸함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물론 순식간에 변하는 계절에 따라 마음속에 간직한 쓸쓸함은 다음 가을을 기약하며 금세 사라졌지만, 그 쓸쓸함이 자리 잡는 그 짧은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고독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와는 성별을 가진 이성이 세상에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지만, 그 절반 중에서 정작 나를 향해 마음을 전해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지독한 사춘기를 거치는 동안,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해줬다.


"낙엽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대."


세상에, 녹색의 생기를 뿜어내던 그 찬란했던 시절은 온데간데없는 데다, 땅바닥에 닿는 순간 바스러질 것 같은 지극히 가벼운 낙엽일 텐데, 왜 낙엽에 우리는, 나는 '사랑'을 애써 대입해야만 하는 걸까? 벚꽃잎이 흩날려 장관을 이뤄내는 완연한 봄에도 잎을 잡으려 하지 않았으면서, 왜 메마른 낙엽을 애써 잡고 첫사랑을 기억해야 할까? 아직 첫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 낙엽이 가진 메시지를 이해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 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바로 사랑이라는 걸 느끼기엔 너무나 어렸고, 첫사랑이 과연 나에게도 있을까 라는 의문을 이제야 갓 가지기 시작할 무렵의 나는, 낙엽이 떨어지는 이유는 단순히 중력과 계절 변화 때문이라 확신하고 있었던 거다.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체험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면서 사람들의 기억, 마음속에 그 어떤 부분보다 크게 자리 잡은 이 '사랑'이라는 존재를 어찌 해석해야 할까?라는 기본적인 고민조차 하지 못한 채, 당장의 성적과 입시라는 단순한 목표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 나에게 중요한 것임을 스스로 다짐하고, 주위에서 주입받으며 풋내 나는 그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걸 처음 느꼈을 때, 다시 말해 첫사랑이 나에게 찾아왔을 때, 너무나 당황해서 낙엽을 주웠는지 아니면 그저 바라봤는지 조차 떠올리지 못한 건, 나만의 잘 못은 아니었을 거다.


세상은 참 잔인하다.

사랑으로 가득 차서 잔인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고, 서로 사랑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갈망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가치가 사랑임을 노래한 시와 소설과 에세이가 너무나 많아서 잔인하다. 사랑은 꿈만 같고, 따뜻하고, 포근하며, 다정하고 때로는 열정적이라는 긍정적인 부분만을 강조한 나머지 사랑이 떠났을 때의 감정을 가르쳐주지 않아, 그걸 이해하느라 꽤 많은 시간과 감정을 허비해야 했기에, 세상은 참 잔인하다고 할 수 있다.


서로 사랑을 하는 순간만큼은 서로에 대한 벽을 허물어뜨리겠다며 작정하고 투명한 관계를 유지하려던 그때의 감정처럼 투명하다 못다 눈 부신 소주병에서 맑은 액체가 잔으로 흘러나와 담기는 그 순간은 참 아름답다. 이별의 상처니, 세상의 좌절이니,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고, 병에서 잔으로 무사히 액체가 이동하기만을 바랄 뿐. 소주잔 가득 찰랑이는 액체를 입 안으로 연거푸 털어놓으며, 사랑의 후유증, 이별의 상처를 더 쓴 소주로 메워보겠다 객기를 부리며 사랑이 참 따뜻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마음에 굵은 칼로 흔적을 남겼다.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이. 바위는 바람에 퇴화되어 모래가 되고, 모래는 바위였던 시절의 위용을 기억하지 못하건만, 사람은 사랑과 이별의 반복을 겪으며 마음속에 새긴 여러 개의 깊은 상처가 지워지지 않아, 꿈에서 사랑을 바라며, 꿈에서 이별을 슬퍼하고, 현실에서 소주에 의존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러니 세상은 참 잔인한 거다.


늦가을의 퇴근길이면 어김없이 낙엽을 바라보게 된다. 보려 하지 않아도. 낙엽을 잡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그때의 나는 어디 가고, 여러 번의 만남과 이별, 그러니까 사랑의 과정을 통해 깊은 상처로 가득한 나만이 낙엽을 바라보며 사랑의 체취를 떠올리려 애쓴다. 애는 쓰지만, 퇴색되어 버린, 변질되어 버린 사랑이라는 존재를 처음 마주했을 때 그 모습으로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고 보니 나의 사랑은 낙엽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구나."


한없이 가볍고, 한없이 허술하고, 한없이 허름한 모습으로 바닥에서조차 정처 없이 흩날리는 존재이지만, 올해가 지나고 내년 봄이 되면 낙엽이 머물렀던 나뭇가지엔 낙엽이 남긴 흔적이 새롭게 발화하여 녹색의 생기를 다시 한번 뿜어 낼 기회를 맞이할 테니. 나 역시 지금은 낙엽과 같지만, 이 시기가 지나면 또 다른 사랑에 생기를 뿜어낼 시기가 올 게 분명할 테니. 그 사랑이 비록 온전하다 말할 수 없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보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큰 사랑은 없을 게 분명할 테니.


이제야 알겠다. 낙엽에 첫사랑이 담겨 있는 이유를. 수많은 사람이 마음속에 사랑의 상처를 간직하고, 낙엽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이다음에는 또 다른 생기, 사랑을 뿜어낼 순간이 분명히 올 거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는 걸. 그래서 사람들이 낙엽을 애써 잡으려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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