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면 함께 걷고 싶다

by 장아무개

"건조한 가을을 뚫고 오래간만에 비가 내린다."


모든 것이 하얀 백지 같아서 미래의 가능성까지도 백지 같아서, 그 위에 마음대로 쓰면 어른이 되어 모두 이뤄낼 것 같았던 어린 시절엔 친구들과 마냥 웃으며 뛰어 놀기 위해 비를 맞았다. 그 백지 위에 한 줄 두 줄 나의 흔적이 그어지기 시작하며, 밑줄로 나타난 흔적이 어느 한 뱡향을 서서히 향하게 되는 시작점이었던 청소년 시기에는 축구를 하기 위해 비를 맞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비를 맞았고,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비를 맞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겁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 시절의 비는 '너는 충분히 멋진 사람이 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라며 안심을 전해주는 역할이었다고나 할까.


백지 위 흔적들의 깊이가 다양해지고, 혼자만의 흔적으로는 백지를 모두 채울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는 청춘의 시기에도 역시나 비가 내리기를 원했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경쾌하게, 어떤 때는 파괴적으로 내리는 각각의 비는 하나같이 나에게 소중한 의미가 됐다. 특히 부드러운 비가 내릴 때면, 혼자만의 흔적으로 가득한 나만의 백지가 아닌 함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사람과 거리를 걷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기도 했다. 이때의 비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고조시키는 역할이었을까. 언제나 비가 내리면 너와 내가 함께 걷는 서울 한적한 마을의 골목길을 상상해보곤 했다. 비는 내리지만 어둡지 않으며, 구름을 끼었지만 옅은 구름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와 포근함을 안겨주는 그런 날. 포슬포슬 내리는 비 덕분에 골목에 빼곡히 자리 잡은 오래된 집의 지붕 색은 더욱 선명해지고, 회색빛의 담벼락은 짙어진 색깔만큼 세월의 깊이를 드러내는 그런 공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건조한 날씨 덕분에 먼지가 날리던 오래된 보도블록이 아니라, 촉촉한 비 덕분에 태초의 모습으로 되돌아 간 듯 보이는 그 골목. 충분한 습기를 머금은 보도블록 덕분에 소리가 바닥으로 스며들어 둘이 걸으며 지나간 그 거리엔 우리의 흔적이 전혀 남지 않는 세상을 함께 보내고 싶은 욕망이 언제나 너를 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심상에 자리 잡은 이 풍경을 너와 함께 나누고 싶어, 나는 여러의 '너'에게 비가 내리면 함께 걷자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사랑이 일방향이든 쌍방향이든 상관없이.


"첫사랑은 언제나 아프다."


처음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의 사랑은 언제나 외사랑이었다. 아, '언제나'라는 단어와 '첫'이라는 단어의 혼합이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첫사랑을 가장한 외사랑을 여러 번 거친 나로서는, 외사랑이 끝나기 전까지의 사랑은 '언제나 첫사랑'이었다. 그렇게 믿었다. 외사랑은 언제나 아팠다. 너를 좋아하는 나의 마음이 전달해지길 바라지만, 세상은 원래 그러하듯 너는 나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음에 좌절했다. 되려 너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한 첫 사랑이자 외사랑을 전하려 하며, 나는 그걸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지극히 잔인하지만 풋내 나는 그러나 그 시기를 지나야만, 앞으로 수없이 많은 사랑과 상처의 단계를 어른스럽게 거쳐갈 수 있는 통과의례를 겪어야 했던 첫사랑의 시절에도 비는 내렸고 어김없이 나의 백지 위에는 흔적이 하나 그어졌다. 그 흔적이 모여 지금의 '나'가 되었음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게다가 사람이 언제나 가슴 아픈 외사랑만 할 수는 없으니까.


'사랑'을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비의 의미는 크게 달라졌다. 그저 해맑게 웃으며 맞을 수 있었던 비는 수줍음으로 변해 우산으로 가리거나 처마 밑으로 피해 들어가기 일쑤였으며, 비를 맞으며 우정을 나눴던 그 순간은 , 비를 피해 한적한 곳으로 숨어든 너와 나의 은밀한 순간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세상의 이치 상으로도 나는 나로 계속 남을 수 없었고, 너를 만나 내가 그리던 흔적의 속도 역시 더욱 빨라지는 게 당연했다.



"비를 맞으며 너의 흔적을 뚜렷이 새기고 싶다."


너무나 빠른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의 흔적이 그려지던 그 순간에도, 한 가지 바람이 있었다면 비가 내리는 날 너의 손을 잡고 '사랑'을 느꼈던 그 순간부터 그려온 심상의 거리를 실제로 걸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빠른 속도로 내 인생의 백지가 채워지는 순간에도, '비가 내리는 그 거리'는 언제나 변함없이 그리고 천천히 시간이 흐르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너와 나의 실제 시간의 흐름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사람이라는 게 참 희한해서 사랑을 하는 순간은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을 억지로 붙잡을 수 없지만, 마음속에 그리던 그 거리를 너와 함께 비를 맞으며 걷는 순간을 기억하고 간직해 영원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너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비를 함께 맞자'라고 권했던 거고. 심상의 순간을 현실에서 오래, 함께 할수록 내 인생의 백지에 남겨지는 흔적은 더욱 깊어져, 설령 네가 떠나고 난 후에도 나는 너를 기억하며 한 동안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그 믿음만큼 비가 내리길 바랬다. 물론 만나고 있는 순간마다 너와 나의 이별 후의 순간을 떠올렸던 건 아니지만.


여러 번의 사랑이 지나고 모든 사랑의 순간마다 비를 함께 맞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그렇다고 너의 흔적을 나의 백지에 남기고 싶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오늘처럼 건조한 가을, 참으로 오래간만에 대지를 적시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함께 걷지 못한 '너'를 만나 함께 걸어보자 이야기하고 싶다. 이미 지나간 사랑이지만, 그때의 너 역시 나에게 과분한 흔적을 남겨주었기에 나만의 공간으로 너와 함께 걸으며 보답해보고 싶다. 그리고 난 후엔 지금의 '너'에게 똑같은 길을 지난 '너'보다 더 긴 시간 동안 걸어 보자 이야기할 테다. 아니 억지로라도 끌고 갈지도 모르겠다.


비가 내리면,

비가 내려 너에게 함께 걷자 이야기하게 되면

너는 아무런 의심 없이 나의 손을 잡아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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