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하나는 회개입니다. 저는 잘 몰랐지만, 교회를 찾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한 주의 나머지 요일, 그러니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세속적인 삶에 찌들어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빠짐없이 주님 앞에서 회개를 고해야 한다고 배웠고, 이를 실천했습니다. 세속의 삶을 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는데, 그게 바로 죄가 되어 버리다니.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교회에만 가면 저는 언제나 죄 많은 한낱 인간에 불과했고, 회개를 하여 죄사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내가 무슨 잘 못을 그렇게 많이 했을까? 언제나 의문이었습니다.
교회에서 회개기도를 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주시옵소서'가 아닐까 합니다. 세파에 찌든 육체를 이끌고 교회에 와서 회개 기도를 열정적으로 드리니, 그에 대한 대가를 달라는 것이었죠. 도대체 뭘 그리 많이 달라고 하는지, 옆에서 열심히 '주시옵서소'를 외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실눈을 뜨고 기도하는 모습을 바라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을 가졌지만, 지금처럼 소위 '사이비 신자'가 될 운명도 함께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회개가 되었냐고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저의 신앙이 깊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나 자신조차 어쩌지 못하면서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걱정하는 기도는 여전히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며, 세속적인 삶이 어찌 죄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토록 열정적으로 회계를 위한 통성기도를 하는 것보다 최근에 산책에 빠지면서 되려 산책이 깊은 회개의 시간이 될 수 있음을 느낍니다. 면의 나와 만나는 그 시간이야 말로 나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내가 무엇을 잘 못 했는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교회'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기준으로 바라보고 평가하고 고쳐갑니다.
산책하는 동안 눈을 통해 들어오는 온갖 시각적, 청각적 만남들이, 교회를 다니며 불안정하게 형성되어 있는 신앙보다 더 깊은 자극이 될 수 있음을 느낍니다. 칸트는 혼자만의 시간을 철저하게 지켰으며, 니체는 회복의 시간 동안 산책을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티끌조차 따라갈 수 없는 저이지만, 그들이 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산책을 하는 동안 쉬는 기관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입'. 통성기도를 통해 쉴 새 없이 소리를 만들어 내는 그때의 그것과는 달리, 산책하는 동안 입만큼은 언제나 닫혀 있습니다. 굳이 입을 열여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나의 몸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철저히 차단하며, 내면의 소리가 울릴 수 있도록 기능합니다.
반드시 산책을 하며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뭐 그리 잘 못을 많이 했길래... 매번 회개할 거리가 생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죄를 짓지 않는 한 주를 살 수도 있는 것이고요. 산책은 회개의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나의 내면을 더 들여다보는 시간을 만들어 줍니다. 통성기도처럼 남들이 들리도록 나의 죄를 고하기보다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은 회개와 사색의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산책은 이런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