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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아무개 Apr 16. 2020

'저녁' 말고 '아침'이 있는 삶

재택근무를 했습니다

꽤  오래전부터 '저녁이 있는 삶'이 직장인의 목표가 되어 왔습니다. 한 정치인은 선거를 앞두고  '저녁이 있는 삶'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모았습니다. 야근으로 점철된 직장이 아닌, 출퇴근 시간으로 매일 3~4시간을 쏟아야 하는 삶이 아닌, 정시 퇴근과 함께 개인의  삶을 풍요하게 만들어주는 '저녁'을 보내는 삶은  지금까지도 동경과 지향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저녁'이라니.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포근해지는 느낌을 전해주는 단어입니다. 본격적인 어둠이 찾아오기 바로 전,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따뜻하고 화려하면서도 편안한 색감으로 하늘과 땅이 물들어가고 있는 순간에, 하루 종일 앉아있던 사무실에서 세상이 아름다움으로 물들어가는 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도 포근한 색으로 함께 물들일 수 있다는 기대가 가득한 순간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저 역시 경기도에 거주하며 서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으로, 저녁이 있는 삶을 '쟁취'하기 위해 잘 다니고 있던 서울의 직장을 때려치우고, 집 근처 회사에 억지로 취업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저녁이 있는 삶, 가 떠 있을 때 집에 도착해 저녁식사를 마쳐도 여전히  밖이 밝아서 가족과 함께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다녀오는 삶을 누려보기도 했습니다. 왕복 3시간 이상의 출퇴근 시간을 10년 이상 허비해야 했다가 왕복 20~30분 시간만 하루에 소비하면 되니,  남는 시간만큼의 여유가 생겼고, 그 여유는 삶의 질 향상으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러냐고요? 여러 가지 문제 가 겹쳐서 다시 왕복 3시간 이상의  출퇴근에  몸담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직장과 저녁이 있는 삶이  함께 하기란 참 어렵구나 라는 경험을 얻기도 했고요.


그리고 여전히 저녁이 있는 삶이 최고의 지향점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녁 말고 '아침'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재택근무를 시행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도 그중 하나. 자주 재택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일주일에 하루라는 재택근무가 주어졌습니다. 당연히 재택을 하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저의 생각과는 달리 '아침'이 더 큰 의미로 찾아왔습니다.


저녁이 있는 삶은 하루를 나의 의지로 마무리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조직과 사회의 의지에 맞춰 흔들려야 했지만, 저녁만큼은 나의 의지로 똑바로 세우는 시간. 덕분에 '하루를 잘 살았다'라는 안도감으로 다른 하루를 시작할 용기와 힘을 비축하는 시간이 바로 '저녁이 있는 삶'입니다.  


반면 아침엔 오직 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조용히 산책을 시작합니다. 평소라면 절대 할 수 없을 아침 산책이 재택근무를 하면서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고,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더욱 자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수많은 소음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혼자만의 시간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주위의 시선보다 내면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는 시간. 그 시간을 통해 그날 하루를, 일주일을 준비할 기운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야 좋겠지만, 보통의 직장인이 서재와 같은 공간을 가지기란 쉽지 않습니다. 아침이 아직 여물지 않은 시간, 온 가족이 아직 잠들어있는 시간, 조용히 일어나 서재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어제 다 읽지 못한 책을 펼쳐 계속 읽을 수 있는 환경이면 참 좋겠지만, 아직은 그 공간을 마련하지 못했기에, 가족이 깰세라 조용히 문을 열고 산책에 나섭니다. 


평소 출근할 때 마지하는 똑같은 아침이지만, 아침이 있는 삶의 아침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빠른 걸음으로 수많은 사람을 헤쳐 어제와 똑같은 사무실, 그 책상에 앉아 제시각에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 따위는 없습니다. 마음속에 여유가 차곡차곡 쌓이고,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집니다. 상쾌한 아침 공기의 흐름이 한 올 한 올 느낄 수 있는 여유가 몸안 가득 차오릅니다. 그리고 깨닫게 됩니다. 


"이게 바로 아침이 있는 삶이구나."


사람은 결핍 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재택근무를 통해 알게 된 아침이 있는 삶도 마찬가지. 하루 3~4시간의 출퇴근을 반복하는 생활 속에서 겨우 하루의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기에 아침이 있는 삶의 소중함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저녁 대신 '아침'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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