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사회에서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나마 나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정하고 그에 맞춰 직장을 무리 없이 다는 것이라 믿으며 20년을 보냈습니다. 20대 중후반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중요한 시간이었음에도 직장생활에 적응하느라, 박봉을 쪼개고 쪼개 나름대로 미래를 준비하느라 참 바보같이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30대 역시 직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위아래 조율하며 직장생활을 하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직장에서의 안착은 나의 성공으로 보상받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감도 차있었나 봅니다. 아래에서 이제 갓 들어온 신입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받으며, 위에서는 상사의 인정이 담긴 칭찬을 받으며 나의 직장생활을 영원할 거라 믿었습니다. 사회의 한 부속품으로 굳건히 자리 잡으면 그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는 영원한 부속품으로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 참으로 바보 같은 믿음이었지만, 직장이 사회생활의 모든 것이라 생각했기에 당연한 것이라 믿었습니다. 20대와 30대의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어떻게 지냈는지도 모르게.
그리고 40대가 되었습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 직장생활 이건만, 40대에 들어서 정신적 결핍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연봉은 올랐지만 몸은 늙어 예전 같지 못하고 정신은 그만큼 닳아버렸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나이 40을 넘자 찾아왔습니다. 이러한 순간이 올 거라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에, 그 순간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위에서는 내가 노력하면 그만큼 보상을 받을 거라 이야기했지만 그 보상이 정신적 결핍을 메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결핍과 충격이 갑작스러운 순간에 찾아올 거다라고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고스란히 저 혼자 감당해야 했습니다.
어떤 책에서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40대 가장에게 혼자 있을 장소를 허하라'라고. 현재 어떤 상황 속에 있느냐에 따라 이 문장의 해석이 달라지겠지만, 직장생활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부속품으로서의 역할만 해야 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과 후회 속에 지쳐가던 저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함을 스스로 깨달았나 봅니다. 그리고 주중에는 하지 못했던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누리기 위해 주말이 되면 출근 시간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공간에서 한 두어 시간을 보내고 오는 일이 어느새 생활의 루틴이 되었습니다.
아침 시간에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 어디든 좋았습니다. 걸어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산책로의 공원에 앉아 나만의 시간을 보내거나 차를 끌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공원의 한적한 공간에 캠핑의자를 펼쳐놓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오는 일. 물론 그 시간 동안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10분, 20분 바라보거나, 새소리 사이에 묻어 있는 저 멀리 자동차 소리를 멋진 음악인 양 감상한다거나. 그런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행복이 참 좋았습니다. 가끔은 한 주 동안 쌓여 있는 생각과 고민의 실타래를 하나 둘 꺼내고 풀어내어 복기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엉켜있는 실타래가 하나씩 풀리면서 후회와 반성을 하며 40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 자신으로 굳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를 멍때림이라고 부르고, 저는 '멍때림연구소'를 열었습니다.
주말이 되면 저만의 시간과 공간을 위해 떠돌다 자리 잡고 멍때림을 즐기는 그 순간을 영상으로 기록합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나의 멍때림이 절대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전적으로 개인적 이유로 시작한 멍때림이기에 주위에 권유할 소재조차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이렇게 계속 멍때림을 기록하다고 뭐가 되려나..라는 기대 역시 없습니다. 개인적인 멍때림, 개인적으로 나를 완성하는 시간이 좋아 시작한 멍때림연구소, 한 동안은 쉬지 않고 멍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