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대학기숙사 짐을 싸며 내가 만든 '홀로서기 시간표'
며칠 전부터 우리 집 거실 한켠엔 조금씩 아들의 짐이 늘고 있었다. 올해 대학신입생인 아들이 이제 곧 기숙사 입소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덤덤하려 해도 요 며칠간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다.
나는 아들이 태어날 때 분명 나와 연결되었던 탯줄을 끊었고, 그 증거물까지 여태껏 보관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보이지 않는 두 번째 탯줄이 존재했었나 보다. 나와 아이의 정서적 탯줄 같은 것 말이다.
한 인간의 성장과정을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관계가 '부모자식 인연' 외에 또 있을까? 처음 내 품에 아이를 안고 황홀했던 순간부터 대학생이 되어 독립을 앞둔 지금까지 한 뼘에 들어올 것 같은 짧은 시간이었다.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기쁨을 선물해 준 아들은 고된 내 인생에 하늘이 준 '보너스 선물'이었다.
"고맙다 아들, 내 아들로 태어나 줘서, 엄마가 네게 보통엄마가 될 기회를 줘서"
남편은 며칠 전 아들과 내게 '핸드폰 사진정리 어플'을 깔게 했다. 그리곤 그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보관돼 있던 가족사진 파일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분류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 덕에 가족모두가 어디서든 우리 가족의 지나온 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곧 독립해 성장통을 겪을 아들을 위한 '비상약'이었을까? 아니면 상실감을 느낄 나를 위한 '작은 위로' 였을까? 아무튼 요즘 남편이 한 일 중에 가장 마음에 든다.
모여있는 사진들을 주르륵 쓸어내리니 '어린 아들'에서 '어른 아들'로 진화하는 성장과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우리 부부의 젊은 날 사진들은 덤이다. 참 파릇파릇했다. 어떤 추억은 우리 부부의 기억에만 남겨져 있었고, 어느 시점부터는 우리 부부의 기억보다 아들의 기억이 훨씬 더 정확했다.
나는 사진 속 '어린 아들'이 지금 내 옆에 있는 '어른 아들'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곤 울컥했다.
이런 내 감정의 파도를 느낀 남편은 나의 등을 쓸며 말했다.
"아들 키우느라 그동안 수고했어"
나도 가만히 남편의 눈을 보며 말했다.
"당신도 고생 많이 했어,
그리고 앞으로 돈 더 많이 들어가니까 더 열심히 해. 푸핫"
다소 현실적인 내 답에 우리 부부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부부는 켜켜이 쌓인 사진들만큼 수많은 추억들을 함께 꺼내보며 '아들의 첫 물리적 독립'을 기념했고 우리 부부의 '인생 제2막의 시작'을 자축했다.
나는 눈물 속 '사진정리 세리머니'를 통해 아들과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두 번째 탯줄마저 완전히 끊어 내고 있었다. 그래야 아들이 가볍게 더 큰 세상으로 떠나갈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었다.
사실 나는 아들이 독립과 함께 대학생활에 잘 적응할지 보단, 내가 아들로부터 독립해 잘 적응할지가 걱정이었다. 아들의 탄생 이후 지난 20년간 나의 시간은 언제나 아들의 궤적을 따라 흘렀기 때문이다. 이제 곧 내 시간의 주인이 아들에게서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그 사실이 나는 두렵다.
"20년 만에 맞이하는 자유시간을 감당할 수 있을까?"
계획형인 나는 앞으로의 변화에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나만의 시간표가 절실했다.
시간을 잘 보낼만한 여러 가지 대안을 생각해 보았다.
#01. 1일 1 카페는 주부인 내게 너무 사치일까?
동네에 새로 생긴 스타벅스에 가면 왠지 마음이 편해 지곤 한다. 커피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곳의 커피 맛이 내 구미에 딱 맞는다. 그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핫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를 시켜놓고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오고 싶다.
#02. 혼자영화를 보는 건 어떨까?
암전 속에서 오로지 주인공들의 이야기에만 몰입해 울고 웃는 그런 시간도 좋지 않을까? 아이를 키우는 기간 동안엔 몰입이 주는 해방감을 감히 기대하기 어려웠다. 몰입이야 말로 홀로일 때 가장 기대해 볼만하다.
#03. 불쑥 워킹맘인 친구를 찾아가 볼까?
친구 퇴근 후 같이 맥주 한잔을 해 보는 건 어떨까? 고맙게도 친구는 이미 내 홀로서기에 본인을 이용하라며 흔쾌히 희생양이 되길 자처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그 친구가 말을 그렇게 했지만 그 친구 아들도 이제 고3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고3 학부모의 마음은 고3 학부모를 경험한 사람만 알 수 있다. 그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듯한 스펙터클한 고3 일 년간의 감정 동요를 말이다.
#04. 남편 회사로 데이트를 하러 나가볼까?
남편이 나의 몰라보게 변신한 모습을 보고 놀라 자빠지거나 다시는 이러지 말라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본다면 성공이다. 하지만 요즘 나에겐 아쉽게도 이쁘게 꾸밀 에너지가 조금도 없다. 갱년기에 진입한 지 좀 된 나는 이제 외모에 대한 집착을 많이 내려놓았다. 변신하고 싶지만 별짓 다해도 변신되지 않는 그 한계의 또 다른 이름이 갱년기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시술을 하거나 수용을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나는 그냥 수용하는 쪽을 선택했다. 50년을 버틴 세월이 수놓은 주름이나 얼굴의 모양새가 어떤 꼼수로도 가려지지 않는다.
#05. 유럽여행책을 사서 나라별로 정복해 가는 건 어떨까?
거실벽에 아날로그식이지만 분위기 나게 세계지도를 붙이고 가보고 싶은 그 나라의 골목길들을 구글맵으로 미리 구경하는 건 어떨까? 구경을 멈추고 직접 밟아볼 날이 생각보다 빨리 다가올지도 모른다. 같은 꿈을 자꾸 꾸다 보면 꿈처럼 진짜 이루어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니까.
#06. 아침 일찍 기차역에서 발권이 가장 빠른 기차를 아무거나 타보는 건 어떨까?
젊은 시절엔 마음이 동하는 대로 새마을호, 무궁화호 등의 열차를 타고 부산이든, 전주든 혼자서도 잘 누비지 않았던가? 낯선 그곳에서의 오랜만에 사람구경은 어떨까? 잊고 있었지만 내가 젊었을 때 가장 좋아했던 게 바로 이런 짓이었다. 이런 즉흥적인 여행길에 나는 인생에 대한 수많은 성찰을 했었다.
#07. 오전 열 시엔 무조건 산책하자!
이제 날도 풀리고 산책하며 햇빛 쬐는 건 우울감 관리에 필수다. 하천에서 오리들도 만나고 컨디션이 좋은 날엔 만보도 우습다. 무릎 상태가 좋으면 살짝 뛰어봐도 좋겠다. 요즘 기안 84 덕에 동네에 뛰는 아줌마, 아저씨들 천지다. 뛰고 땀이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디제품으로 시원하게 샤워를 하곤 하루 종일 소파에서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꼼짝 않고 넷플릭스와 함께 뒹굴뒹굴 거려야지.
#08. 수시로 가고 싶을 때마다 동네 도서관에 가자!
책을 들고 쉴 수 있는 공간이 넉넉한 그곳에서 여러 책들도 보고 어떻게 늙어갈지 지혜를 얻자. 노트북도 가방에 '척' 넣고 그곳에서 멋지게 글도 써봐야지.
이렇게 시간표대로 지내다 보면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시간은 흘러가 있을 것이다. 아들은 한동안은 엄마 집밥이 그립다며 일주일마다 빨랫감을 들고 찾아와 나를 귀찮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일주일이 이주일이 되고, 이주일이 한 달이 될 것이다.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세 달이 될 것이다. 천천히 기간을 두고 멀어지는 것, 이것이 '친절한 독립의 과정'이다.
지금 친절한 독립의 과정 그 출발선에 나와 아들은 서 있다. 이렇게 다짐을 해도 나는 한동안 아들이 무척 보고 싶을 것 같다.
"아들! 우리 잘할 수 있겠지?"
"나 잘할 수 있겠지?"
아들의 짐이 빠져나간 거실 한구석, 이제 그 빈자리를 나는 설레는 나만의 시간표로 채워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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