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약에 우리>를 남편 몰래 혼자 보러 간 이유

멜로 영화를 보러 갔다가 모델하우스에서 울컥

by 보통엄마

언젠가 꼭 해보고 싶었던 to-do 리스트 중 하나인 ‘혼영(혼자 영화 보기)’을 드디어 감행했다.

좋아하는 구교환 배우의 신작 소식에 마음이 동했다.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기에 남편과의 동행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첫사랑이 아니니까.


우린 다행히도 서로 첫사랑이 아니고 ‘두 번째 사랑 즈음’이다. 나에게는 두 번째 사랑이고, 남편에겐 몇 번째인지 굳이 캐묻지 않아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린 그즈음에서 만난 사이다.


common.jpeg 출처 : 만약에 우리 포스터



영화관 좌석에 앉아 무심히 둘러보니 혼자 보러 오신 분들이 꽤 있었고, 언뜻 보니 내 나이대여서 피식 웃음이 났다. 호기롭게 도전하였지만 중년의 ‘혼영’에는 몇 가지 허들이 있었다.


첫째는 좌석 선택.

동네 영화관이라 아는 얼굴을 마주칠까 겁나 모자를 푹 눌러썼다. 평소엔 쳐다도 안 보던 구석진 자리를 골랐다. 안경을 써도 노안 때문에 자막이 가물거리는 나이지만, 다행히 한국 영화라 귀만 열어두기로 했다.


둘째는 상영 전의 정적.

조명이 꺼지기 전, 혼자 자리를 찾아 올라가는 그 짧은 계단이 왜 그리 멀고 쑥스럽던지.


셋째는 치고 빠지는 전술.

영화가 끝나고 여운에 젖은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오는건 쉽지않은 일이다. 눈치를 보며 엉거주춤 일어서는데, 저 앞에서 중년 아저씨 한 분이 바람처럼 단번에 인파를 빠져나갔다. 역시 우리 나이는 인생의 ‘치고 빠지는 전술’을 몸으로 터득한 세대 아닌가. 나도 그 기세를 몰아 스피디하게 출구를 빠져나왔다.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왜 남편과 통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을까?

꺼둔 전화기를 켜고 버튼을 눌렀지만 받지 않는다. 영화 보러 가기 직전 제목을 묻길래 간단히 말해주고 끊었는데, 혹시 주제가 ‘첫사랑’이라 마음이 상했나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사실 영화를 보고 훌쩍이는 분들이 꽤 많대서 나도 내심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길 기대했다.

실제로 상영관 여기저기서 한두 명씩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와 다르게 나는 ‘첫사랑’이란 주제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갱년기 호르몬 탓인가? 아니면 여주인공의 외모가 나의 20대와 너무 달라 감정 이입에 실패한 것일까?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육원 출신인 여주인공 정원이를 관통하는 결핍은 바로 '집'이다. 영끌해서 산 서울의 아파트가 아니라, 힘들 때 언제든 돌아가 쉴 수 있는 안식처와 가족에 대한 갈망이다.


생활고 때문에 편입의 꿈을 접고 아파트 모델하우스 도우미 일을 하게 된 정원.

마감 시간에 소등하며 불 켜진 아파트 미니어처를 바라보다 울컥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도 함께 무너졌다.


나의 경우는 이십 대는 아니었고 십 대 후반부터 도심을 바라보며 했던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 많고 많은 아파트 불빛 중, 왜 우리 집은 없을까?"

그 시절 내게 창문의 불빛들은 금방 사라질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영화 초반, 정원이는 습관적으로 찾아간 보육원에서 원장이 본인의 진짜집으로 휴가를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은호에게 묻는다. “진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게 뭐지?”


그녀가 건축과 선배에게 마음을 뺏기게 된 이유도 비슷했을 것이다.

자기 집을 짓고 싶은 꿈을 가진 그녀에게 건축가는 그 꿈을 실현해 줄 가장 완벽한 적임자로 보였을 테니까.


영화 내내 정원이가 안쓰러웠고, 마치 그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물론 나는 부모님과 남동생이 있었기에 조금 나았으려나?)


그럼에도 나는 정원이가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그 시절의 나에 비하면 대학도 갔고, 외모도 예뻤고, 마음도 구겨지지 않고 반듯했다.

그러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나쁜 집(은호)’을 떠날 용기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은호를 견디다 못해 떠날 때, 나는 마음속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영화는 찌질했던 첫사랑을 통과한 모두의 판타지를 첫 장면부터 확실히 채워준다.

성공한 두 사람이 비행기라는 로맨틱한 공간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회하고, 단번에 서로를 알아본다.


현실에선 불가능에 가깝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외모는 계속 ‘다운그레이드’ 중이고, 그 복잡한 기내에서 스치듯 서로를 알아본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영화를 찾는 건,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이었던 그 순수한 시절의 나를 잠시나마 면회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은호와 정원이가 1, 2년쯤 뒤에 홀로 서지 못한 채 다시 만났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 애틋한 감정마저 현실에 묻혀 희미해졌을지도 모른다.


집에 다 와갈 때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혼자 보니까 너무 쓸쓸하더라. 갱년기 때문인지 감정 이입도 안 되고 말이야.”

일부러 엄살을 섞어 털어놨더니, 남편은 기다렸다는 듯 껄껄 웃는다.


“그러게 왜 혼자 가! 다음엔 나랑 같이 스릴러나 SF 보러 가자.”


남편에게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다시 극장을 찾아야겠다.

멜로의 여운보다는 피 튀기는 액션스릴러와 팝콘의 고소함이 더 잘 어울리는,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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