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KTX 내장을 펼쳐줘”

하늘에서 본, 블록처럼 쌓여가는 KTX 부품들

by 문좀열어주세요

“KTX 내장을, 아니 내부를 펼쳐 보이는 건데요” 이 말로 생각보다 쉽게 설득되었다. 사진기자 공동 취재와는 다르게 한 명, 또는 한 팀만 단독으로 취재하는 사진기사도 있다. 좁은 고시촌 방과 치열한 응급실을 담은 사진 등 기획 의도를 갖고 장기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인 경우다. 기자가 먼저 요청하기도 하고 콘텐츠를 제공하면 받아들이기도 한다.


2020년 주요 일간지 주말판에 흥미로운 기사가 연재되었다. ‘펼쳐줌(ZOOM)’이라는 코너였는데,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고 궁금한 직업을 ‘테트리스 챌린지’ 형식으로 소개하는 기사였다. 테트리스 챌린지는 물건을 차곡차곡 배치한 사진으로 특정 업무를 소개하는 작업이다. 구급차, 소방차 등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밀접한 일을 알리는 방법으로 해외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범죄감식반이 이동하는 차량과 가방 속 소품들을 바닥에 펼쳐 놓고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식이다. 수직 높이로 띄운 드론에서 한 프레임에 소품들이 담기게 배치해 촬영한다. 펼쳐줌에서 카레이싱 팀의 레이싱카와 부품‧장비와 함께 차량 정비 업무와 경기 준비 작업이 소개된 것을 흥미롭게 보고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진기자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언론 담당하던 동료가 먼저 전화를 받고 내게 넘겼다. 기자 설명을 듣고 마침 스크랩해 놓았던 ‘카레이싱팀’의 펼쳐줌 기사인 것을 확인했다. 의욕이 들끓었다. 기꺼이 취재를 지원하고 싶었으나 여러 상황을 검토해 보니 가능할 거란 확신이 없었다.


수백kg에 달하는 KTX 부품 무게를 생각해보고 선로 위치, 드론을 띄울 수 없는 항공 금지구역 등등 장애가 너무 많았다. 섭외 전화를 여러 차례 돌리다 실수도 있었다. “KTX 내장을 아니 내부 부품을 펼쳐 보이는건데요...”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고 어떻게 기사가 나올지 이해시키기 쉽지 않았다. 백 마디 설명보다 해당 사진기사를 보여주고 가능한 선에서 협의를 진행했다.


앞서 보도된 펼쳐줌의 ‘수중촬영 감독’, ‘왕궁수문장’, ‘트로트 가수의 자동차’ 등처럼 촬영이 비교적 쉬워 보이는 콘텐츠도 있었고, ‘산림항공본부의 소방진화헬기’와 ‘해양경찰청의 경비정’처럼 까다로워 보이는 콘텐츠도 있었다. KTX는 옮길 수 있는 부품만 준비하면 된다고 기자가 말했다. 높은 위치에서 촬영하면 부품 종류보다는 배치 위치와 형태가 중요했다. 진행하기로 하면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였다.


당연하겠지만 KTX 부품을 해체할 필요는 없었다. 교체용 예비부품을 사용하면 됐다. 모두 고중량이라 인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선로 위에서만 달리는 KTX의 이동은 불가능했다. 확답을 못 드리고 담당 부서를 섭외해 보고 알려주기로 했다.


기자와 현장 책임자의 중간에서 조율하고 동원 가능한 장비와 부품 등을 조사했다. 수백kg에 달하는 차량 바퀴(차륜)는 꼭 있어야 했다. 차량 바퀴를 옮기기 위해 지게차도 출동했다. 붉은색 시트의 좌석도 포인트였다. 그렇게 펼쳐 놓을 수 있는 소품들을 고르고 위치를 구상했다.


대형 레인지와 스페너 등 정비 도구도 구해놓았다.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차량 외부 출입문도 옮겨놓았다. 실제 KTX를 정비하는 차량 정비원도 비어있는 바닥을 채웠다. KTX차량에 정통한 관리팀장이 ‘지원 가능 여부’를 신속하게 판단해 원활하게 지원할 수 있었다. 가능한 것 중에서 대표적인 부품, 사진에 잘 나오는 것을 추렸다.


이제 KTX만 이동하면 된다. 마땅한 선로가 없을 것 같았으나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고양 KTX 차량기지 한쪽 ‘청소고’라는 빈 선로가 있었다. 평소에 KTX가 자주 들어가지 않는 곳이라 사전 협의를 거치고 KTX를 위치시켰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모든 과정은 공중에 떠 있는 드론으로 촬영되고 있었다.

IMG_7697.JPEG 드론으로 실시간 촬영하는 화면

하나씩 부품을 옮기는 것이 블록 쌓기처럼 차곡차곡 이뤄졌다. 쌓지 않고 펼쳐 놓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처음에 텅 비었던 바닥이 채워지면서 사진도 완성이 되어갔다. 지게차가 앞서 깔아놓은 부품 사이사이를 피해 다니면서 무거운 차량바퀴를 옮기고 유유히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갔다.

IMG_7690.JPEG 지게차도 동원해 부품을 배치하고 있다

사진과 함께 작업을 설명하는 내용도 신문 전면을 채우기에 KTX 차량정비 작업에 대한 자료도 취합해 제공했다. 관계자 인터뷰도 주선했다. 축구장 200배에 달하는 기지의 면적, 전체 선로의 길이만도 40km를 훌쩍 넘는 곳. 사고나 비상시 수도권을 비롯해 중부권 대부분의 지역까지 대응하는 전천후 기지, 수십 대의 KTX를 매일 정비하는 고속철도 정비의 요람 등등...


특히 코로나19 방역도 강조했다. 열차 운행 전후로 객실 바닥부터, 화장실, 테이블과 손잡이까지 꼼꼼하게 방역하고, 객실 내부의 환기상태를 조절하는 공조 장치도 신선한 공기가 유입되도록 관리하는 등등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취재자료까지 추가로 제공한 후 게재 전날, 가판을 보내왔다. 전면을 가득 채운 KTX와 부품들의 사진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제목이었다. “1mm의 오차에도 탈선...” KTX 정비작업을 강조하려다 탈선이라는 부정적 단어가 들어갔다. 게다가 KTX는 선로의 정비작업과 달라서 몇 mm 오차로 탈선하진 않는다. 차량 정비작업을 설명하면서 바퀴의 간격이 몇 mm만 더 벌어져도 탈선 위험이 있다는 말을 제목으로 쓴 것이었다.

IMG_7805.JPEG

기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제목이 수정되었다. 다음날 지면에도 잘 나왔고, 몇몇 직원들은 프로필 사진으로도 활용했다. 기사에 관심을 갖고 다른 매체에서도 취재요청이 있을까 걱정했으나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펼쳐줌 기사를 공동으로 만들었던 다른 기자는 ‘이달의 보도 사진상’을 받았다. KTX로 받은 것은 아니었다. 자연사한 동물의 표본을 학술과 전시의 목적으로 제작하는 동물표본제작자와 그들의 작업으로 촬영했는데 포트레이트 부문에서 우수상을 차지했다. 하나하나 배치된 뼈들에서 깊은 수고가 엿보였고, 긴 시간이 느껴지는 작업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IMG_7808.JPEG 전폭적으로 도와준 고양KTX기지 직원들



2033년, 30년 운행을 마친 KTX를 해체하는 작업을 다시 한번 촬영하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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