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뉴브강 여행 홍보 ‘눈물’ 외면한 코레일” 한 경제지에 단독을 달고 올라온 기사이다. 익히 아는 경제지는 아니었다. 규모는 작지만 지면이 나오는 경제지였다. 처음에는 유가족들의 슬픔을 외면하고 부다페스트 여행을 권장한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제목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느 정도 입장을 반영해 제목의 톤을 낮춰졌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다뉴브강 유람선 허블레아니(헝가리어로 ‘인어’)호가 야경 투어를 하고 돌아오다가 135m에 이르는 대형 크루즈선‘바이킹 시긴호’와 충돌해 침몰했다. 여기에 타고 있던 한국인 관람객 25명이 숨지는 참사였다. 하필이면 폭풍우가 휘몰아칠 때였고 차가운 물살도 거셌다. 1명의 실종자는 끝내 찾지 못했다. 사고가 발생한 건 2019년 5월 29일 밤 9시 경이었다.
6월호 KTX매거진이 만들어진 건 열흘 전이었다. 5월 20일에 마감하고 바로 인쇄에 들어갔다. 25일부터는 열차 좌석마다 1권씩 꽂혔다. KTX매거진은 열차 안에 비치해 여행 정보를 소개하는 월간지이다. 현지 사고 소식이 전해진 우리나라 시간으로 30일에는 이미 6만여 권이 좌석을 채운 상태였다. 부다페스트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염려했지만 보고하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부다페스트를 낭만있는 여행지라고 소개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보험 차원에서 이실직고하는 수준이었다.
그달 KTX 매거진은 해외여행지 소개 특별 코너로 헝가리를 다루기로 했다. 한국과 헝가리가 수교 맺은 30주년이어서 연초부터 계획했다. 해외 취재여서 4월 중순 사실상 거의 모든 사진과 원고에 대한 얼개가 잡혔다. 총 15페이지 분량으로 다뉴브강을 따라 흐르는 헝가리의 문화와 역사, 여행과 볼거리를 소개했다. 실장급 사진작가께서 표지 후보의 부다페스트 사진을 선정한 이후 더 나은 작품을 위해 강이 내려다보이는 ‘어부의 요새’언덕에 올라 골든아워 대까지 기다리며 사진을 건졌다. 표지가 완성됐다.
전화가 온건 6월 3일 오전이었다. “0000 신문 김 아무개 기자입니다. KTX매거진 담당 박병남 과장님이세요? KTX매거진 6월호에 부다페스트 유람선 사진이 표지에 실렸는데 몇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당시에는 언론 담당이 아니어서 직접 대답하지는 않았다. 상황이 심각할 듯해서 담당 부장과 언론대응 실무자를 통해 답을 내놓기로 했다.
내심 ‘기사가 될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유가족이 본다면 마음이 더욱 아플 것이다. 외주 제작팀에게 그 부분을 다시 만들라고 하는 것도 할 짓은 아니었다. 이미 인쇄되어 꽂혀있는 매거진을 모두 뽑는 것도 쉽지 않았다. 6만여 권을 다시 인쇄하면 6월 10일 이후에나 나올 텐데 비치하는데 또 5일이 걸린다. 7월호가 나오기 전까지 열흘을 위해서 다시 제작하는 셈이다.
예산도 문제였다. 한 권 한 권 뽑고 다시 비치하는 사람을 별도로 써야 했다. 미리 준비해둔 예산도 있을 리가 없었다. 사람을 쓰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 시간도 문제였다. 열차는 그 시간에도 전국을 달리고 있었다.
서울역에 올라온 열차가 1시간 남짓 정차하는 동안 이용객이 내리고 타는 시간, 청소 시간을 빼면 20여 분 짧은 시간에 좌석에 있는 매거진을 모두 바꿔치기 해야 한다. 그렇게 80대 KTX에서 작업해야 한다. 하루에 기껏해야 3~4대 열차 분량의 매거진을 바꿔치기할 수 있다. 단순 계산으로도 20일이 걸린다.
광고 계약 문제도 있었다. 기사를 공동 기획한 헝가리 대사관과의 관계도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이 복잡했다. 답이 없는 상황에서 다음날 기사가 올라왔다.
KTX매거진 6월호 ‘먼 나라 여행 헝가리 편' 객실 비치…"헝가리 대사관 협찬ㆍ광고 계약 때문에...’
기사에서는 코레일이 유람선 사고가 발생한 뒤에도 헝가리 대사관 측과의 협찬 계약과 광고 수익 등을 이유로 책자를 수거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일주일여의 시간이 지났으나 ‘여전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책자를 실은 채 여전히 운행 중이라고.... 해당 기자는 발행인이 당시 기관장인 000이라고도 ‘콕’ 집었다.
투어를 중단하고, 예약 금액을 환불한 국내 여행사의 대책과 비교했다. ‘공기업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식의 시민 인터뷰도 담았다.
기자에게 이해를 바라며 정중하게 설명했던 ‘외주 제작’, ‘광고주와의 게재 조건’, ‘헝가리 대사관과의 관계’, ‘검토사항’ 등도 모두 변명처럼 실렸다. 분량만 채워줄 뿐이었다.
매거진은 급한대로 순차적으로 회수했다. 시간과 인력의 물리적 한계로 한 번에, 기간 내에 모두 처리하지 못했지만 홍보실 직원까지 동원하고 나는 2주일간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KTX 첫차에서 매거진을 뽑는 일을 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 달에 마침 기관장과 점심 식사 자리를 가졌다. 매거진 담당자라고 소개하자 기관장께서 몇 마디를 해주셨다. “실무자가 할 수 있는 고민이 있고 책임자가 내릴 수 있는 해법이 있다.” “수천만 원이 드는 돈을 쏟아부으며 업무를 뒤엎는 건 실무자가 할 수도 없다. 나중에 그 문제를 책임질 수도 없고, 감사에 걸릴 수도 있는데, 그럴 때 책임은 책임자에게 넘겨야 한다.”
“보고를 받고도 제대로 판단을 못하면 경영진이 잘못한 것이며, 실무자는 판단을 경영진에 맡겨야 한다고 하셨다. 결정이 내려지면 나중에 감사도 받지 않고, 욕도 안 먹을 수도 있는데, 왜 낑낑 대냐고... 언론의 과잉 보도가 아니다. 지적할 수 있고, 위기 관리란 그런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코레일은 재난이 있을 때마다 아픔을 나누기 위해 힘써왔다. 그해 2019년 만해도 4월 강원도 고성·강릉·인제에서 발생한 연쇄 대형산불에 발 벗고 나섰다. 자원봉사자가 전국 모든 열차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사내 낙산연수원 시설을 자원봉사자에게 제공하고 재난구호도 기부하며 이재민 돕기에 나섰다. 관광객 감소 등 경제 침체가 우려되는 강원지역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5월까지 강릉선 KTX 전구간 운임을 할인하기도 했다. 기관장도 ‘어게인, 고 이스트’에 동참하며 강원지역 살리기에 앞장섰는데, 6월에 그런 기사가 난 것이다.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유람선 침몰’은 세월호를 연상시킨다. 하나의 사건으로 단순하게 끝나지 않는다. 응어리진 기억이 떠오른다. 민감한 상처까지 미처 챙기지 못했다. 어렴풋이 염려했지만 일을 더 키우고, 짐을 떠안길 수 없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책임지기 싫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실장님처럼 “전량 회수하세요. 돈, 사람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말하지 못했다. 때로는 모진 결정도 필요하다.
부다페스트 건을 비롯해 그간 경험을 바탕으로 매거진을 만들 때 기억해야 할 수칙을 만들었다.
□ 함박눈이 내릴 때 제작한 매거진이 벚꽃 떨어질 때 꽂힌다.
현재가 아니라 회수되는 시점을 생각해라, 최대 2달의 시간 차이가 있다.
※ KTX매거진은 여행 잡지라 풍경 사진이 중요한데, 그해 벚꽃, 낙엽 사진은 사용할 수가 없다. 잡지를 만들 때와 무르익을 때가 다르기 때문이다.
□ 아무도 안 보는 것 같은데, 하필 보는 사람이 있다.
논란이 될 내용은 사전에 배제해라. 한 번 찍으면 한 달은 꽂힌다.
□ 사장님 관심사는 간부 관심사인데, 독자는 무관심하다.
그렇다고 안 실을 수도 없는 법, 가능하다면 흥미로운 콘텐츠와 엮어라.
□ 매거진은 우리 공사의 기관지도, 공문도, 보도자료도 아니다.
담당자마저 내부 직원의 입장에 서면 매거진의 정체성이 흔들린다.
□ 믿어야 한다.
‘KTX매거진 제작’이라는 명함을 판 30명이 나보다 강한 애착으로 일한다.
□ 믿으면 안 된다.
철도에 대한 가짜뉴스는 많고, 철도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확인해줘라.
매달 20일 밤, 인쇄를 넘기기 전까지 되도록 늦게 남아 기사 확인을 도와라.
□ 독자는 바쁘고, 성질이 급하고, 회의적인데, 또 꼼꼼한 사람이다.
□ 친절하게 쓴 ‘요금반환 규정’ 혼자 독박 쓴다.
400원 반환금에 한 달 내내 시달린다. 반환·할인 등 돈 관련된 기사는 빼라. (약관에는 예외 조항이 많아 짧은 기사로는 반환금을 설명하지 못하는 이례사항이 많다)
□ 모든 기자에게 구체적인 내용으로 기사의 소감을 알려줘라.
단순히“잘 읽었습니다” 가 아니라 글에 대한 느낌을 글로써 솔직하게 전해줘라.
매거진을 담당하며 얻은 큰 자산은 200페이지 남짓한 1권을 오롯이 만드는 경험이다. 공기업을 비롯해 어떤 기관이든 실체가 있는 결과물을 실무자가 만드는 기회가 많지 않다. 광고가 반이고, 광고성 기사도 큰 비율을 차지하고, 그마저도 대부분 제작사가 맡아준다. 하지만 실무자로 제작에 발을 담그고 매달 기획 회의에서 의견을 나누면 ‘기획’이 어떤 결과물로 나오는지, 무슨 과정을 거치는지, 어떻게 독자와 소통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다뉴브강 건으로 발행 이후에도 ‘소통’이 쌍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걸 뼈저리게 체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