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확고하게 다져진 나의 패션세계 - 01
지금의 내 꼴을 보면 모두가 경악할만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내가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건 패션계라는 사실이다.
나도 한때는 입고, 걸치고, 신는 것들에게 적잖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었다. 가끔은 무대의상에 버금가는 옷을 구비해 놓고 내 몸뚱이로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던 시절이다. 딱히 정해진 스타일이란 것도 없었다. 그냥 내가 어떤 옷이 잘 어울리는지 알아가는 시기였던것 같다. 심지어 그런 실험기간은 패션업계에서 일을 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딱히 그럴만한 이유는 없었다. 그놈의 망할 호기심, 그게 다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인지, 아니면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패션이나 스타일에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산다. 되려 무감각과 무신경의 반열에 올라선 듯하다. 그 결과로 지금은 똑같은 티셔츠와 바지를 몇 벌씩 구매하고 한없이 돌려 입는 수준에 이르렀다. 겨울옷과 여름옷의 차이는 옷의 두께와 길이, 그리고 외투의 유무 정도의 차이만 있다. 신발마저도 똑같거나 비슷한 모델을 신는다. 맘에 드는 모델을 기억해 뒀다가 다시 살 때쯤엔 재구매를 한다. 단종이 되지 않는 한.
이런 식으로 옷을 입기 시작한 지는 이미 수년은 됐다. 예전에 하던 실험의 부작용인지 이제는 딱히 구미가 당기는 옷도 없다. 그리고 불현듯 유행에 발맞춰가는 것도 귀찮고 소모적이라는 감정이 커졌다.
하지만 지금의 방식으로 사는 것은 장점이 어마어마하다. 우선 집안에서 옷 관리가 몹시 간편하고 수월하다는 것. 다양한 옷이 있으면 옷의 소재나 형태, 색상에 따라 보관이나 세탁법이 제각각이다. 하지만 나는 죄다 똑같은 옷만 가지고 있다 보니 그만큼 관리에 신경을 덜 써도 괜찮다. 신경을 덜 쓰게 되니 옷과 관련된 소모적인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도 나에겐 꽤 큰 장점이다. 다른 신경 쓸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닌데 뭘 입을까에 고민하는 것을 없애준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만족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가끔씩 옷을 다시 사야 할 때도 일말의 고민이나 내적갈등 따윈 없다. 무엇을 사야 할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정해진 길이 있다면 수고로움을 줄여준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