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박자 늦은 세계

회색 비 내리는 오후 2시, 고독한 연극 속으로 출근하다

by boundary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진수에게 그 0.5초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었다. 남들은 그 순간을 ‘살고’ 있었지만, 진수는 그 순간을 ‘관찰’하고 있었다. 첩보 영화 속 스파이처럼, 정체가 탄로 날까 봐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는 피로감이 그를 짓눌렀다.

밴쿠버의 1월은 계절이라기보다 하나의 ‘증상’에 가까웠다. 도시를 집어삼킨 무채색의 회색 비는 14층 통유리창을 통해 진수의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진수는 방금 작성한 슬랙(Slack) 메시지를 전송하지 못하고 있었다. 커서는 문장 끝에서 규칙적으로 깜빡이며, 그의 망설임을 조롱하는 듯했다.


"I think we should verify the changes on the staging environment before merging." (머지하기 전에 스테이징 환경에서 변경 사항을 검증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문법은 완벽했다. 의미도 정확했다. 하지만 진수는 ‘전송’ 버튼을 누르는 대신 백스페이스 키를 눌렀다. 옆자리의 닉(Nick)이라면 절대 이렇게 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더 가볍고, 더 자연스럽게 썼겠지.


"Quick sanity check on staging?" (스테이징에서 한번 확인할까?)


"Wanna give it a spin on staging first?" (스테이징에서 먼저 한번 돌려볼까?)


진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로는 그들의 단어를 알지만, 가슴으로는 그 온도를 흉내 낼 수 없었다. 진수가 구사하는 영어는 학교에서 배운 정직한 벽돌 같아서, 아무리 쌓아 올려도 그들 특유의 유려한 곡선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처음에 썼던 딱딱한 문장을 그대로 전송했다. 순간, 자신이 정교하게 조립된 북미 직장인의 모조품 같다는 생각이 그를 덮쳤다. 겉보기엔 그럴듯하지만, 속은 텅 빈 마네킹 같은 존재.


“Hey Jin-su, wanna grab lunch?” (진수, 점심 먹으러 갈래?)

닉이 쾌활하게 물었다. 진수는 의자를 돌리며 반사적으로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에 조립해 넣었다.


“Yeah. Just finished something up.” (응, 뭐 좀 막 끝냈어.)


휴게실 공기는 이미 전자레인지에 데운 음식 냄새와 가벼운 농담들로 꽉 차 있었다.


“Dude, his bit about the airport security? I was dying,” 닉이 테이블을 치며 웃었다. “It’s like, ‘Sir, I need to check your shoes,’ and he’s like, ‘My soul is in these soles!’”


좌중이 폭소를 터뜨렸다. 진수도 웃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가를 찡그리며, 적당한 데시벨의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순간 진수의 뇌는 차가운 연산 장치처럼 윙윙거리고 있었다.


[농담 처리 중] ‘Soul(영혼)’ 대 ‘Sole(밑창)’. [유형] 언어유희. [맥락] 권위적인 공항 보안 요원. [판정] 유머러스함. [명령 실행] 웃음.


정확히 0.5초


남들이 본능적으로 웃음을 터뜨릴 때, 진수가 유머를 분석하고 표정을 짓기까지 걸리는 시간이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진수에게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었다. 남들은 그 순간을 ‘살고’ 있었지만, 진수는 그 순간을 ‘관찰’하고 있었다. 첩보 영화 속 스파이처럼, 정체가 탄로 날까 봐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는 피로감이 그를 짓눌렀다.


“Did you catch the Canucks game last night?” (어제 하키 경기 봤어?)

또 다른 동료가 툭 던진 질문에 진수는 매끄럽게 대답했다.


“Only the highlights. That save in the third period was… insane.” (하이라이트만 봤어. 3 피리어드 세이브는 진짜… 미쳤었어.)


“Right? Demko was a wall!” (그치? 뎀코는 그냥 벽이었다니까!)


동료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적인 방어였다. 하지만 진수는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 사소한 대화조차 그에게는 ‘전투’였다.


그는 퀴노아와 케일이 섞인 샐러드를 씹었다. 점심 메뉴조차 ‘건강하고 자기 관리 철저한 밴쿠버라이트’의 코스프레였다. 입안 가득 쓴맛이 퍼졌다.


열네 살. 언어를 체득하기엔 너무 늦었고, 정체성이 굳어지기엔 너무 어린 나이에 태평양을 건너왔다. 부모님은 그것을 ‘기회’라고 불렀고, 진수에게 ‘주류(Mainstream)’가 되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무엇인가?


한국에 가면 ‘느릿하고 혀 굴리는 소리를 하는 교포’였고, 이곳에선 ‘조용하고 일 잘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동양인’이었다.


'영원한 손님. 완벽한 이방인'


‘아까 너 너무 경직돼 있었어.’


내면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진수의 가장 가혹한 감시자였다.


‘닉이 농담할 때, 네 눈은 안 웃고 입만 웃었어. 걔네도 다 알 거야. 네가 연기하고 있다는 걸.’


무심코 켠 핸드폰 속 링크드인 세상은 화려했다. 예전 동료의 승진부터 지인의 창업 소식까지, 타인의 화려한 근황들이 화면을 메우고 있었다.


머릿속의 ‘자격미달 경보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봐. 마흔 먹고 아직도 슬랙 메시지 하나에 벌벌 떨고 있잖아. 농담 하나도 머리로 계산해야 하잖아. 넌 가짜야.’


진수는 반도 못 먹은 샐러드 통을 닫아버렸다. 자리로 돌아오는 길,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중년 남성.


하지만 진수는 알았다. 저 유리에 비친 남자는 완벽을 연기해야 한다는 강박과,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지독한 외로움이 빚어낸 슬픈 합작품일 뿐이라는 것을.


오후 2시, 밴쿠버의 비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진수는 다시 모니터 불빛 속으로, 그 완벽하고도 고독한 연극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밴쿠버의 긴 밤, 당신이 건넨 온기 한 잔. 이방인의 삶은 때로 서늘합니다. 여러분이 보내주시는 커피 한 잔은 글을 써 내려가는 제게 가장 든든한 난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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