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긴 사랑

핏기 없이 바싹 익힌, 그 질긴 사랑의 맛

by boundary
진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부모님이 진수에게 먹이고 있는 것은 스테이크가 아니라, 그들의 못다 산 삶 이었다. 이 질긴 고기를 씹어 삼키고 튼튼하게 자라서, 제발 우리 대신 저 무시무시한 세상과 싸워 이겨달라는 애원.


밴쿠버의 비는 공평했다. 다운타운의 고층 빌딩이나 외곽의 낡은 타운하우스나, 축축한 회색빛은 어디에나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빗소리를 듣는 마음까지 공평하지는 않았다.


열네 살의 진수에게 밴쿠버의 밤은 언제나 조금 추웠다. 학교에서 하루 종일 영어를 못 알아듣는 바보가 되어 돌아온 날이면, 진수는 도망치듯 제 방으로 숨어들곤 했다.


어둑해진 창밖으로 빗줄기가 굵어질 무렵, 방문 틈으로 냄새가 스며들어왔다. 된장찌개 냄새와 버터 냄새가 기묘하게 섞인, 이민자 가정 특유의 냄새.


“진수야! 나와서 손 씻고 앉아. 오늘 아빠가 고기 사 오셨다.”


어머니의 부름에 진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갔다. 식탁 중앙에는 코스트코에서 사 온 거대한 립아이 스테이크가 김을 내뿜고 있었다. 어머니는 늘 고기를 ‘웰던(Well-done)’으로 구웠다. 핏기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질색하셨기 때문이다. 겉은 거무튀튀하게 타고 속은 퍽퍽하게 익어버린 고기.


그것은 어쩌면 우리 가족의 이민 생활을 닮아 있었다. 겉보기엔 그럴듯한 서양식 식탁이지만, 씹어보면 질기고 낯선 맛.


“많이 먹어. 한창 클 땐데.”


아버지가 묵직한 손으로 고기 한 덩이를 덜어주셨다. 진수는 나이프질을 시작했다. 고기는 질겼다. 턱이 뻐근할 정도로 씹어야 겨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학교는 어땠니?”


아버지는 시선을 고기에 둔 채 무심한 듯 물으셨다.


“그냥… 괜찮았어요.”


진수는 학교에서 힘들었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그 이야기는 단순히 '힘들다'는 투정이 아니라, '우리의 이민은 실패했다'는 선고처럼 들릴 테니까.


“성적표 나왔다며.”


이미 성적표를 봤던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수학 점수가 그게 뭐니? 여기서 수학까지 밀리면 답도 없어. 민석이는 이번에 올 A라더라.”


어머니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저 건조하고, 실망감이 섞인 낮은 톤. 차라리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면 도망칠 핑계라도 생길 텐데, 어머니의 그 차분한 목소리는 진수를 의자 위에 묶어두는 족쇄 같았다.


민석이. 교회에서 만나는 그 이름은 진수에게 실존하는 인물이라기보다, 부모님이 만들어낸 ‘완벽한 아들의 허상’처럼 느껴졌다.


“이번에 서술형 문제가 좀 어려워서… 영어가 딸리니까 해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진수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어렵다는 건 핑계야. 네가 자꾸 캐네디언 애들하고 똑같이 놀려고 하니까 그런 거야. 걔들은 여기 사람이잖아. 넌 달라.”


어머니가 딱 잘라 말했다. 그때, 아버지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거들었다.


“진수야. 우리가 널 여기 데려오려고 뭘 포기했는지 알지?”


그 말은 마법의 주문이자 저주였다. 한국에서의 안정적인 직장, 친척들, 친구들, 익숙한 모국어의 세계.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낯선 땅에 와서 겪는 부모님의 고생. 진수는 그 목록을 줄줄 외울 수 있었다.


“넌 걔들보다 두 배는 더 노력해야 해. 너는 걔들 보란 듯이 떵떵거리고 살아야지. 주류로 들어가야지.”


아버지의 목소리에도 짙은 실망감이 묻어났다. 무거워진 공기를 틈타 어머니가 자신의 접시에 남은 마지막 고기 한 덩이를 툭, 진수의 접시로 옮기며 말했다.


“더 먹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야.”


부모님은 나를 사랑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너무나 위태로웠다. 그들에게 진수는 단순한 아들이 아니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에 가로막혀 이 사회에 진입하지 못한 부모님이, 자신들이 결코 닿을 수 없는 그 담장 너머의 세상에 보낸 대리인이었다.


‘더, 더, 더.’


그들의 요구는 탐욕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안이었다. 자신들이 겪은 멸시와 소외를 자식에게만큼은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그 간절함.


‘내가 완벽하지 않으면, 부모님은 불행해진다.’


그 엄청난 부담감은 어린 진수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갉아먹었다. 타인의 인정 없이는, 훌륭한 성과 없이는 스스로를 가치 있게 여기지 못하는 마음의 구멍이 그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진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부모님이 진수에게 먹이고 있는 것은 스테이크가 아니라, 그들의 '못다 산 삶' 이었다. 이 질긴 고기를 씹어 삼키고 튼튼하게 자라서, 제발 우리 대신 저 무시무시한 세상과 싸워 이겨달라는 애원.


진수는 목이 메어왔다. 부모님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그 초라하고 떨리는 등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서, 그 무게를 외면할 수 없어서였다.


고기는 좀처럼 씹히지 않고 입안에서 겉돌았다. 진수는 부모님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턱이 얼얼해질 만큼 씹어야 하는 이 질긴 덩어리가, 어쩌면 저 두 분의 팍팍한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네, 더 열심히 할게요.”


진수는 꿀꺽, 질긴 고깃덩어리를 씹지도 않고 삼켰다. 식도가 꽉 막히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창밖의 빗소리가 더 거세지고 있었다. 진수는 묵묵히 포크를 움직였다. 그것이 열네 살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슬픈 사랑법이었다.




밴쿠버의 긴 밤, 당신이 건넨 온기 한 잔. 이방인의 삶은 때로 서늘합니다. 여러분이 보내주시는 커피 한 잔은 글을 써 내려가는 제게 가장 든든한 난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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