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에서의 이방인 생활
여기서는 다수와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 모든 찰나의 순간이 이탈이었다. 심지어 그의 머리카락조차 조직의 규격에 맞춰 재단되어야 했다.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소속의 증거로서
대학 졸업장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 진수는 도망치듯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부모님의 숨 막히는 기대, 밴쿠버의 차가운 회색 비, 그리고 무엇보다 지긋지긋한 ‘영원한 손님’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싶었다. 거울 속 자신과 똑같은 검은 머리, 똑같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서울의 거리를 걸으며, 그는 처음으로 숨이 트이는 듯했다. 최소한 이곳에서는 생김새만으로 튀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곳이라면 숨 쉬는 것조차 투쟁이 되는 삶을 끝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오산이었다.
한국이라는 거대한 조직 사회는 진수에게 밴쿠버와는 전혀 다른, 훨씬 더 복잡하고 은밀한 형태의 가면을 요구했다. 테헤란로의 한 IT 기업. 사무실은 유리벽 너머로 강남의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고층 빌딩에 있었다. 진수는 영어 실력 하나로 그곳에 들어왔다. 부모님은 진수가 캐나다에서 주류에 스며들기를 바랐지만, 정작 14살에 한국을 떠나 터득한 그 언어가 서울로 돌아온 진수에게 가장 먼저 문을 열어준 무기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묘한 아이러니였다.
취업은 그렇게 이루어졌지만, 한국의 회사 문화에 적응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고통이었다.
주말을 맞아 기분 전환 겸 밴쿠버에서 즐겨하던 짧은 크루컷으로 머리를 잘랐다. 두피가 살짝 비칠 정도로 시원하게 민 머리. 밴쿠버에서는 그저 스포티하고 깔끔한, 여름날의 가벼운 선택일 뿐이었다.
월요일 아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공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그의 정수리를 훑고 지나갔다. 속삭임 같은 웃음소리가,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들렸다. 진수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판정이 내려진 기분이었다.
그날 오전, 사내 메신저 창이 깜빡였다.
[박태수 팀장] 진수 씨, 잠깐 옥상으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든 박 팀장은 담배를 입에 물고 진수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의 미간에는 깊은 골이 파여 있었다.
“진수 씨, 혹시 집에 무슨 우환 있어? 아니면 회사에 불만 있나?”
상사의 질문은 걱정이 아니라 명백한 문책이었다.
“아니요.”
진수의 담백한 대답에 박 팀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여기가 구멍가게도 아니고, 다 같이 일하는 조직이야. 남들 다 단정하게 하고 다니는데, 혼자 머리를 밀고 오면 위에서 우리 팀을 어떻게 보겠어? 튀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말끝에 실린 한숨이, 진수의 가슴에 납덩이처럼 내려앉았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신경 쓰겠습니다.”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순응이었지만, 속으로는 작은 파도가 일었다.
'왜 헤어스타일이 조직의 평화를 깨는 반역이 되는 걸까?'
밴쿠버에서는 눈을 맞추지 않거나 발음이 어눌할 때 이방인 취급을 받았지만, 여기서는 다수와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 모든 찰나의 순간이 이탈이었다. 심지어 그의 머리카락조차 조직의 규격에 맞춰 재단되어야 했다.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소속의 증거로서.
숨 막히는 감각은 회식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프로젝트 마감을 핑계로 찾아간 삼겹살집. 자욱한 고기 연기와 소주 냄새가 뒤섞인 공간에서 폭탄주가 끊임없이 돌았다. 상사가 잔을 비우기 전에 미리 병을 대령해야 하는 눈치, 두 손으로 술을 받고 고개를 돌려 마시는 예절. 그것들은 진수에게 해독하기 어려운 고차원적인 암호였다.
밤 10시가 넘어가고 1차 자리가 파할 무렵,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2차 노래방으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진수는 조용히 의자에 걸어둔 재킷과 가방을 챙겼다. 무의미한 감정 노동을 멈추고, 단 몇 시간이라도 온전한 개인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시끌벅적하던 식당 앞의 공기가 일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박 팀장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진수를 노려보았다.
“진수 씨, 지금 분위기 파악 안 돼? 다들 내일 출근 안 해서 2차 가는 줄 아나?”
한국의 직장 문화에서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자, 충성심을 증명하는 종교의식에 가까웠다. 그 보이지 않는 룰을 깨고 개인의 시간을 챙기려는 진수는 조직의 결속을 해치는 이물질이었다.
“외국에서 와서 개인주의적인 건 알겠는데, 한국에 왔으면 한국 법을 따라야지. 우리가 남이야? 다 같이 고생했으면 끝까지 같이 가야지, 어디서 혼자 쏙 빠지려고 그래?”
‘우리가 남이야?’
그 말은 진수의 명치를 무겁게 때렸다. 그들은 ‘우리’라는 단어로 묶여 있었지만, 그 견고한 울타리 안에 진수의 자리는 없었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차가운 냉소가 번졌다. 밴쿠버의 파티에서라면 일찍 자리를 뜨는 건 개인의 자유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회식은 연장된 노동이자, 보이지 않는 야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 술 냄새와 땀 냄새에 섞여 흔들리며, 진수는 차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 갈색 눈동자. 겉모습은 이 칸에 탄 누구와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밴쿠버에서는 백인들 틈에 섞이지 못하는 ‘외형적인 이방인’이었다면, 서울에서 그는 같은 얼굴을 하고도, 그들의 정서와 리듬을 전혀 맞추지 못하는 '내면의 이방인'이었다. 차라리 생김새라도 달랐다면 그들이 자신에게 ‘우리’라는 잣대를 들이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언어도, 핏줄도 같다고 믿었기에 그 고립감은 훨씬 더 날카롭게 진수의 뼈를 시리게 했다.
그는 거대한 기계의 규격에 맞지 않는 불량 부품이었다. 결국 진수는 서울의 속도와 끈적한 집단주의를 견디지 못하고, 입사 2년을 채우지 못한 채 조용히 사직서를 제출했다.
밴쿠버의 긴 밤, 당신이 건넨 온기 한 잔. 이방인의 삶은 때로 서늘합니다. 여러분이 보내주시는 커피 한 잔은 글을 써 내려가는 제게 가장 든든한 난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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