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

지도에는 없는 나라, '당신'이라는 땅을 찾아서

by boundary
꿈에 부풀어 밟았던 서울 땅. 그곳에서의 20대는 외로웠고, 성취보다는 상실이 컸으며, 방황의 연속이었다.


퇴사 후, 진수는 진정한 의미의 '경계인'이 되었다. 빈손으로 밴쿠버로 돌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고, 한국의 속도를 따라가기에는 숨이 찼다. 가장 뜨겁게 타올라야 할 20대의 시간은 그렇게 하얀 재만 남긴 채 흩어지고 있었다. 진수는 서울이라는 바다 위를 정처 없이 표류했다.


아침이면 지하철의 사람들 틈에 몸을 끼워 넣었지만, 그 밀도는 그를 더 고립되게 만들 뿐이었다. 이어폰 너머로 새어 나오는 음악도, 카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도, 모두가 낯설었다. 그는 이 도시의 일부가 될 수 없었고, 동시에 이 도시 밖으로 나갈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떠돌았다. 움직이는 군중 속에서 멈춰 서 있는 사람처럼.


생계를 위해 선택한 영어 강사라는 직함은 그나마 편리한 보호색이었다. 강의실 안에서만큼은 유창한 영어가 그에게 권위를 빌려주었고, 발음의 미세한 어색함과 겉도는 행동은 교포라는 라벨로 포장되어 용인되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 불이 꺼지면, 진수는 다시 철저히 혼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진수가 담당하던 직장인 회화반에 수연이라는 새로운 수강생이 들어왔다. 그녀는 썰물처럼 학생들이 빠져나간 강의실에 남아 진수에게 사소한 말들을 건네오곤 했다. 하루는 그녀가 뜬금없이 물었다.


“선생님은 한국어 할 때보다 영어 할 때 목소리가 더 낮네요. 어느 쪽이 진짜 목소리예요?”


그 질문을 받은 순간, 진수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밴쿠버에서도, 서울에서도 누구도 묻지 않았던 질문. 그동안 아무도 껍질 속에 웅크린 진수의 내면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묵혀둔 진심이 툭 튀어나왔다.


“둘 다… 제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아요.”


진수의 씁쓸한 대답에 수연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 됐네요. 저랑 있을 때는 아무 말 안 해도 되니까. 그냥 편한 대로 해요.”


그 담백한 위로에, 진수는 처음으로 머릿속에서 24시간 윙윙대던 '눈치 통역기'의 전원을 껐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시간은 강의실 밖으로 확장되었다. 퇴근길 포장마차에서 어묵 국물을 나누어 마시거나, 주말 오후 한강 둔치를 걷는 소박한 데이트였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소음 속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고요한 주파수. 그녀와 함께라면 침묵조차 어색하지 않았고, 서툰 한국어도 흉이 되지 않았다.


계절이 두 번 바뀌고 다시 겨울이 찾아왔을 때, 진수는 확신했다. 더 이상 이 사람 없이는 안 되겠다고.


“결혼하자, 우리.”


프러포즈는 싱거웠다. 퇴근길 지하철역 앞, 붕어빵을 호호 불어가며 나눠 먹던 겨울밤이었다. 거창한 이벤트도 반지도 없었지만, 수연은 진수의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웃었다.


“그래. 대신 붕어빵 꼬리는 내가 먹을 거야.”


결혼은 진수에게 안식처였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여전히 그에게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했다. 매일 아침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을 때마다, 진수는 자신이 닳아 없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문득 밴쿠버의 회색 비가 그리워지는 날들이 늘어갔다. 물론 안다.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갑자기 삶이 장밋빛으로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여전히 그는 백인들 틈의 동양인일 것이고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는 평생 떼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잠든 수연의 얼굴을 보며 진수는 생각했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겉돌고 헤맬지 모르지만 이 사람과 함께라면 그 방황조차 외롭지 않을 것 같다고. 성공하지 못해도, 주류가 되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진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수연아, 우리… 캐나다로 갈까?”


그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다. 14살의 진수에게 상처를 주었던 곳, 도망치듯 떠나온 그 회색 비의 도시로 돌아가자는 제안. 하지만 이번엔 도피가 아니었다. 부모님의 욕망을 짊어진 대리인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언젠가 생길지도 모르는 아이와 함께 '우리의 삶'을 꾸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수연은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진수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평소 진수가 밴쿠버가 그립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기에 놀라거나 주저하는 기색은 없었다.


“가자. 오빠가 자란 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


수연은 진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거기 가서 오빠가 또 이방인 같다고 느껴지면 어때. 내 앞에서는 그냥 오빠면 되잖아. 여기나 거기나, 우린 그냥 우리끼리 잘 살면 되지.”


그 단순하고 명쾌한 대답에 진수의 가슴속에 묵직하게 얹혀있던 돌덩이가 내려앉았다.


그렇게 진수는 다시 태평양을 건너기로 결심했다. 꿈에 부풀어 밟았던 서울 땅. 그곳에서의 20대는 외로웠고, 성취보다는 상실이 컸으며, 방황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기나긴 표류 끝에 진수는 소중한 진리를 얻었다. 자신이 영원히 지도 위의 국경선, 그 어디에도 완벽히 속할 수 없는 존재임을. 그리고 그것이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이제 그에게는 수연이라는 이름의 땅이 생겼으니까. 어디에도 닻을 내리지 못한 채 떠돌던 그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따뜻한 육지였다.




밴쿠버의 긴 밤, 당신이 건넨 온기 한 잔. 이방인의 삶은 때로 서늘합니다. 여러분이 보내주시는 커피 한 잔은 글을 써 내려가는 제게 가장 든든한 난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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