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마주한 벽

이민, 그 차가운 현실에 대하여

by boundary
무엇보다도, 자신은 이 사회의 당당한 주인이 아니라 그저 물건을 대고 푼돈을 받아야 하는 철저한 '을'이자,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 같은 '손님'이라는 자각이 그의 목을 강하게 조르듯 다가왔다


밴쿠버로 돌아온 첫 3년은 진수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가난한 시기였다. 서울에선 취업의 문을 열어주던 열쇠였던 영어가, 밴쿠버에 발을 내딛는 순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도구조차 되지 못했다. 그렇게 마주한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높고 견고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거대한 벽 앞에서 진수는 인생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한 이민 생활. 그는 매일 새벽,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하루를 열었다. 밴쿠버 외곽 공장의 열기 속에 갓 구워진 빵을 트럭에 싣고, 아직 잠들지 않은 도시의 혈관을 따라 다운타운 마트들을 돌았다. 빵의 달콤한 온기와 트럭의 차가운 매연이 뒤섞인 새벽 공기는 그가 넘어야 할 오늘의 벽이자,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고단한 육체노동의 틈바구니에서도 진수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수연 덕분이었다. 밀가루가 눈처럼 하얗게 내려앉은 낡은 점퍼를 입고 현관문을 열 때면, 수연은 언제나 군말 없이 그의 점퍼를 받아주었다.


"오빠, 고생했어."


그 다정한 한마디는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단숨에 녹이는 마법 같았다. 난방비를 아끼려 겹겹이 옷을 껴입고 낡은 아파트에서 컵라면을 먹으면서도 두 사람은 킥킥거렸다. 서울의 매끈한 빌딩 숲에서 느꼈던 세련된 공허함 대신, 이곳에선 맨땅에 헤딩하며 삶을 쌓아 올리는 진짜 땀 냄새가 났다. 벽 너머의 세상은 차가웠을지언정, 단둘이 의지하는 그 작은 아파트는 그 어느 곳보다 따뜻했다.


하지만 그 알콩달콩한 온기 한구석에는 늘 미래에 대한 서늘한 불확실성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막연한 불안이 현실의 폭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온 것은 유난히 차가운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이었다.


납품 일정에 쫓겨 숨을 헐떡이며 다운타운 마트 진열대에 빵을 채워 넣고 있을 때였다. 통로를 지나가던 덩치 큰 백인 남자가 진수의 카트를 거칠게 치고 지나갔다. 진수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 뻔하자, 남자는 미안해하기는커녕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툭 내뱉었다.


"Move it, you yellow monkey" (비켜, 이 노란 원숭이 새끼야)


순간,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진수의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고, 귓가에는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당장이라도 쫓아가 멱살을 잡고 사과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진수의 발은 시멘트 바닥에 단단히 들러붙은 듯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마트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밀가루가 허옇게 묻고 빗물에 젖은 후줄근한 점퍼, 피로에 절어 핏발 선 눈. 다음 마트 납품 시간은 이미 빠듯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은 이 사회의 당당한 주인이 아니라 그저 물건을 대고 푼돈을 받아야 하는 철저한 '을'이자,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 같은 '손님'이라는 자각이 그의 목을 강하게 조르듯 다가왔다. 여기서 소란을 피워서 경찰이 오거나 마트 측과 마찰이 생기면? 납품처를 잃고 당장의 생계가 위태로워질 것이 뻔했다.


결국 진수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인 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카트를 쥐고 못 들은 척 황급히 마트를 빠져나왔다. 트럭 운전석에 올라탄 진수는 핸들에 이마를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굵은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는 소리 사이로, 인종차별적인 모욕을 듣고도 한마디 대항조차 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한심하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수연 앞에서는 당당하게 삶을 개척하는 가장인 척했지만, 세상 밖에서의 자신은 언제든 무참히 짓밟힐 수 있는 무력한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날 밤, 퇴근한 진수를 맞이하는 수연의 맑고 다정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진수의 가슴을 찔렀다. 아무것도 모른 채 환하게 웃는 아내를 보며 진수는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과 짙은 슬픔을 삼켰다. 진수는 잠든 수연의 얼굴을 한참 동안 어루만지다, 조용히 책상 앞 낡은 노트북을 열었다.


그날 이후, 진수는 밤잠을 줄여가며 더욱 미친 듯이 코딩 독학에 매달렸다. 모니터 불빛에 눈이 시려올 때마다 마트에서 느꼈던 뼛속 깊은 비참함이 떠올랐고, 그는 주문처럼 되뇌었다.


'여기서 더 물러날 곳은 없다.'


도망치듯 떠났다가 고심 끝에 다시 돌아온 밴쿠버였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무력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기 위해, 기술이라는 확실한 무기를 손에 쥐어야 했다. 자신 하나만 믿고 태평양을 건너온 수연을 위해, 기필코 이곳에 튼튼한 둥지를 틀어야만 했다.




밴쿠버의 긴 밤, 당신이 건넨 온기 한 잔. 이방인의 삶은 때로 서늘합니다. 여러분이 보내주시는 커피 한 잔은 글을 써 내려가는 제게 가장 든든한 난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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