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어진 부모님의 그림자를 마주치다
'기브 미 수프' 서글픈 희극 같은 대사였지만, 남은 생의 존엄마저 언어의 장벽 앞에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1세대 이민자의 가장 깊은 공포였다.
그로부터 몇 번의 계절이 더 흘러, 진수는 밴쿠버에서 어엿한 개발자로 자리를 잡았다. 수연은 간호학과에 등록해 늦깎이 학생이 되어, 영어와 발음하기도 힘든 의학 용어들과 매일 밤 씨름하고 있었다.
수연에게 간호학과 진학을 간곡히 권한 것은 진수였다. 언어와 문화는커녕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 캐나다에서 오직 남편과 자식만을 바라보고 버텨온 어머니. 그 세월 동안 어머니가 얼마나 외롭고 고립된 삶을 사셨는지 진수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 쓸쓸했던 어머니의 그림자를, 사랑하는 아내에게 드리우고 싶지 않았다.
진수가 밴쿠버에 비로소 뿌리를 내려가는 동안, 그의 부모님은 15년이 넘는 이민 생활의 고단함과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를 이기지 못하고 고국인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그 결정에는 어머니의 두려움이 크게 작용했다.
언젠가 저녁 식탁에서 어머니가 씁쓸하게 내뱉은 말이 있었다.
"나중에 여기 시니어 하우스에 들어가서, 말도 안 통하는 백인들 틈에 끼어 '기브 미 수프' 이러고 늙어가긴 정말 싫다."
서글픈 희극 같은 대사였지만, 남은 생의 존엄마저 언어의 장벽 앞에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1세대 이민자의 가장 깊은 공포였다.
부모님이 밴쿠버에 계실 때는 도망치듯 서울로 향했고, 막상 부모님이 한국으로 떠나시자 다시 밴쿠버로 도망친 꼴이 되어버린 진수. 부모님과의 그 어긋난 궤도를 어떻게든 이어 붙여보기 위해, 그는 학업에 바쁜 수연을 남겨둔 채 홀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부모님의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진수의 기대는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진수의 눈에 비친 부모님은 고향의 품에 완벽히 녹아든 모습이 아니었다. 세월의 공백은 생각보다 깊었다. 떠나 있는 동안 예전 지인들과의 연락은 끊겼고, 그들이 기억하던 한국은 캐나다로 떠나기 전과는 다르게 낯설게 변해 있었다. 마치 오랜 해외 생활로 입맛이 미묘하게 변해버린 것처럼, 부모님의 사고방식과 생활 습관은 바쁘게 돌아가는 한국 사회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채 겉돌고 있었다.
일이 삶의 중심이었던 아버지는, 준비되지 않은 강제 은퇴 후 부쩍 작아져 있었다. 거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하루 종일 의미 없는 뉴스 채널만 돌려보는 아버지의 등은 진수의 기억 속 모습보다 한참이나 굽어 있었다. 소속을 잃고 갈 곳마저 사라진 노년의 불안감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가장 가까이에서 곁을 지키는 어머니를 시도 때도 없이 찔러댔다.
어머니 역시 고국 땅을 밟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평생 떨쳐내지 못한 ‘남과의 비교’라는 지독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평생을 성실히 일했음에도 서울 하늘 아래 내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한 처지를 한탄할 때마다, 그 말들은 날 선 화살이 되어 아버지의 가슴에 박혔다.
공감하기보단 문제를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버지는 아내의 한탄 앞에서 철저히 무력했다. 이제는 아무리 애써도 서울에 집 한 채 해줄 수 없는 초라한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아버지의 어깨는 한 뼘씩 더 무너져 내렸다. 자신이 해결해 줄 수 없는 고통을 그저 듣고만 있어야 하는 형벌 같은 시간 속에서, 아버지는 자꾸만 위축되어 갔다. 어머니의 신세 한탄과 아버지의 무력감이 서로를 할퀴는 처절한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매일 식탁 위에는 정성스레 차려진 한국 음식이 가득했지만, 정작 공기는 식은 국물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아들을 앞에 두고도, 두 분은 식탁 앞에서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위태로운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부모님과 응어리진 관계를 풀며 치유와 안식을 기대했던 한국에서의 시간은, 지나간 세월에 대한 짙은 회한, 그리고 부쩍 늙어버린 채 삶의 여유마저 잃어버린 부모님의 애처로운 모습을 뼈저리게 확인하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밴쿠버로 돌아가는 날, 공항철도를 타기 위해 서울역 플랫폼에 선 진수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말았다. 주름이 부쩍 늘어난 얼굴로 서로를 밀어내던 두 분의 날 선 뒷모습. 그 씁쓸한 풍경을 뒤로하고 다시 태평양 건너로 도망치듯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그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부모님이 쓰러지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그리고 언젠가 자신 또한 나이가 들어 저토록 씁쓸하고 뾰족한 뒷모습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열차의 굉음과 함께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밴쿠버의 긴 밤, 당신이 건넨 온기 한 잔. 이방인의 삶은 때로 서늘합니다. 여러분이 보내주시는 커피 한 잔은 글을 써 내려가는 제게 가장 든든한 난로가 됩니다.
▶️ 이 글은 유튜브에서 오디오북으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