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존재가 태어나는 것이 두렵다
진수는 눈을 감으면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을 닮아 소심하고, 무리의 가장자리를 맴돌며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아이. 과거 마트에서 조롱을 당하고도 고개를 숙여야 했던 비겁함, 그리고 회사에서 투명 인간 취급을 받으면서도 억지 미소를 지어야 하는 이 우울과 불안함이 핏줄을 타고 대물림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수는 몸서리쳤다.
한국에서 마주했던 부모님의 쓸쓸하고 날 선 뒷모습은 밴쿠버로 돌아온 진수의 내면에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언젠가 자신도 부모님처럼 뾰족하게 늙어갈지도 모른다는 예감은 몇 번의 계절이 흘러 현실의 징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수는 시니어 엔지니어가 되었고, 수연도 간호사로 일한 지 1년 차에 접어들었다. 밴쿠버 외곽에 아담한 타운하우스도 장만했고, 주말이면 코스트코에서 카트 가득 장을 보고 돌아오는, 남들이 보기엔 더없이 평범하고 안정적인 이민자의 삶이었다.
하지만 마흔 줄에 접어든 진수는 또다시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 앞에 서 있었다.
"진수, 너의 기술적인 실행력 하나만큼은 정말 탁월해. 남들이 건드리기 싫어하는 기술 부채까지 네가 도맡아 해결했잖아. 덕분에 팀 전체의 생산성이 올라갔어. 네가 처리한 티켓 수도 팀 내 독보적이야."
매년 돌아오는 성과 리뷰 시간. '하지만'이 나오기 전의 의례적인 당의정.
"하지만, 시니어 레벨 그 이상으로 가기에는 존재감이 너무 없어. 넌 너무 조용해. 너의 의견을 좀 더 공격적으로 어필할 필요가 있어."
방을 나서는 진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밤잠을 줄여가며 코딩을 독학해 간신히 이 자리에 올랐다. 언어의 핸디캡을 덮기 위해 누구보다 많은 기능을 구현하고, 묵묵히 팀의 궂은일을 도맡았다. 하지만 이 사회는 묵묵한 성실함보다 자신의 성과를 화려하게 포장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능력'이라 불렀다.
‘일을 이렇게 죽어라 해줘도, 결국 인정받는 건 목소리 큰 놈들이구나.’
40대의 진수는 어느새 사무실의 풍경처럼 익숙하지만, 결코 중심에는 서지 못하는 투명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생존을 위해 불태웠던 열정은 식었고, 그 자리를 하루하루 버티는 매너리즘이 채웠다. 한국에서 강제 은퇴 후 소파에 앉아 무력하게 뉴스만 보던 아버지의 굽은 등. 그 서글픈 그림자가 세련된 밴쿠버 오피스 한복판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 위로 고스란히 겹쳐졌다.
반면 수연은 달랐다. 간호사가 되고 자신만의 세상을 가진 이후, 그녀는 생기가 넘치고 삶에 더욱 열정적이었다.
"오빠, 우리도 이제 아이 가질 때 되지 않았어? 나도 이제 자리 잡혔는데."
아이에 대한 수연의 말이 잦아질수록 진수의 침묵은 길어졌다. 결혼 초창기에는 "자리 잡으면, 집 사면..."이라며 현실적인 이유로 미뤘다. 하지만 모든 조건이 갖춰진 지금, 진수는 인정해야 했다. 자신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 진짜 이유를.
'나를 닮은 존재가 태어나는 것이 두렵다'
진수는 눈을 감으면 상상할 수 있었다. 자신을 닮아 소심하고, 무리의 가장자리를 맴돌며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아이. 과거 마트에서 조롱을 당하고도 고개를 숙여야 했던 비겁함, 그리고 회사에서 투명 인간 취급을 받으면서도 억지 미소를 지어야 하는 이 우울과 불안함이 핏줄을 타고 대물림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수는 몸서리쳤다.
"좀 더 생각해 보자. 지금도 우리 좋잖아. 자유롭고."
진수는 늘 그런 식으로 도망쳤다. 수연의 눈에 서리는 실망감을 애써 외면하면서.
그날 밤도 그랬다. 친구네 베이비샤워에 다녀온 수연이 식탁에 앉아 한참을 말없이 맥주잔만 만지작거렸다.
“오빠, 우리 언제까지 생각만 해? 내 나이도 이제 서른 중반이야. 오빤 내가 늙어서 아이도 못 낳고 후회 속에 살길 바라는 거야? 언제까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피할 거야?”
"피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준비가 됐는지 확신이 없어서 그래."
진수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준비? 집도 있고 직장도 있는데 무슨 준비가 더 필요해? 돈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거겠지!"
수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빠가 바라던 대로 여기까지 왔잖아. 그런데 왜 정작 우리 미래는 피하는 건데? 아이 없이 둘만 늙어가다가... 오빠가 지금보다 더 깊은 침묵 속으로 숨어버리면, 그땐 난 어떡해? 나한테는 오빠가 전부인데, 오빠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난 정말 이 낯선 땅에 혼자 남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수연이 얼굴을 감싸 쥐고 오열했다. 그녀의 울음은 단순히 아이를 못 가져서 부리는 투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회사와 집만을 오가며 점차 고립되어 가는 남편을 보며 느끼는 불안, 그리고 둘만의 세계가 서서히 닫혀가고 있다는 절망감이었다.
진수는 굳어버렸다. 자신이 스스로 만든 껍질 속에 숨어있는 동안, 아내는 혼자서 차가운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순간 진수는 깨달았다. 어머니가 낯선 캐나다 땅에서 겪어야 했던 그 지독한 고립과 외로움을, 자신은 '아이'라는 미래를 차단함으로써 수연에게 똑같이 강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진수의 두려움은 여전히 거대했다. 자신의 결함과 업식이 아이에게 흘러 들어갈 것이라는 공포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수연을 보는 괴로움이 더 컸다.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진수의 세상에서, 그녀는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안식처였다. 그곳마저 잃는다면 진수는 영영 어둠 속에 갇히고 말 것이었다.
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떨리는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미안해. 내가... 너무 겁이 많아서 그래. 갖자, 아이. 내가... 노력할게."
진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기쁨의 약속이라기보단 벼랑 끝에서 내뱉은 항복 선언에 가까웠다. 수연이 안도감에 다시 흐느끼며 진수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지만, 진수의 시선은 수연의 어깨너머, 칠흑 같은 거실 유리창을 향해 있었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겁에 질린,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로 한 남자의 텅 빈 얼굴. 가슴속에 홀가분함 대신 차갑고 무거운 납덩이가 쿵 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자신의 가장 큰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하는 자의 비장하고도 무거운 결심이었다.
밴쿠버의 긴 밤, 당신이 건넨 온기 한 잔. 이방인의 삶은 때로 서늘합니다. 여러분이 보내주시는 커피 한 잔은 글을 써 내려가는 제게 가장 든든한 난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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