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기사들은 왜 이유를 쓰지 않을까

회의록을 다시 쓰게 만든 질문

by 김지영

끝없이 발생하는 회의.
그렇다면 회의록에는 무엇이 남아야 할까.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은
어떤 ‘’을 보고 회의를 닫아야 할까.
그리고 회의가 끝난 뒤,
어떤 상태의 문서를 남겨야 할까.


회의가 많아질수록
회의보다 회의록이 더 중요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잘 정리했는데 아무도 안 움직였다


나는 회의 주재를 자주 합니다.
의사결정, 브레인스토밍, 협업 제안 등.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국어와 영어가 섞인 회의도 많습니다.


회의가 시작되면 녹음을 켭니다.
회의가 끝나면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하고,
미리 준비해 둔 프롬프트에 따라 AI 모델로 회의록을 추출합니다.
1~2회 점검한 뒤 참석자들에게 배포합니다.


이 방식을 6개월 정도 반복했습니다.
분명 효과는 있었습니다.
다만 늘 같은 감정이 남았습니다.


정리는 되어 있는데,
그다음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회의록을 읽은 사람들은
“확인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하지만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는
회의록 밖에서 다시 정리해야 했습니다.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인사청문회에서 회의록 힌트를 얻다


어느 날 국회 인사청문회를 보다가
평소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존재가 보였습니다.
속기사였습니다.


수많은 의원들이 동시에 말하고,
중언부언도 많고,
불필요한 말도 적지 않은데
속기록은 이상하리만큼 정갈해 보였습니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대체 어떤 기준으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리는 걸까.


회의 문화만 보면 국회가 더 혼란스러울 텐데,
기록은 오히려 더 단정해 보였습니다.


속기사들은 해석하지 않는다


속기사는 모든 말을 적지 않습니다.


말투, 감정, 불필요한 조사.
이런 것들은 과감히 버립니다.


대신 남기는 것은 명확합니다.

누가

언제

어떤 말을 했는가.


속기사는 발언의 의미를 해설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옳았는지, 설득력이 있었는지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시점에, 이 사람이, 이 말을 했다”를 남깁니다.


그리고 그 기록은
나중에 책임과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내 회의록은 왜 늘 친절했을까


다시 나의 회의록을 보게 되었습니다.


AI를 쓰고 있었지만,
내 프롬프트는 결국
모든 발언을 최대한 정리하려는 방향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늘 비슷했습니다.

설명은 많고

이유는 길고

결정은 흐릿했습니다.


나는 회의록을 읽는 사람들이
많은 내용을 이해하길 바랐습니다.
그 욕심이 회의록을 더 친절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바쁩니다.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은 더 그렇습니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수렴합니다.


그래서, 나는 뭘 하면 되는 건가요?


속기 방식, 사기업에 이식해 보기


회의 문화 자체를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고,
회의는 늘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됩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습니다.
회의를 바꾸려 하지 말고,
회의록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속기사의 기준을 빌려
회의록을 이렇게만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결정된 것은 무엇인가

조건부로 결정된 것은 무엇인가

결정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각 항목마다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하면 되는지만 남깁니다.


이유와 근거는 쓰지 않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자신의 발언을 이미 알고 있고,
미참석자의 질문은
그때 답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의 문화는 그대로여도,
회의록이 이렇게 배포되기 시작하면
다음 회의에서 사람들의 발언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회의록이 '기준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회의록은 설득문이 아니다


회의록에 이유와 맥락을 모두 적기 시작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제삼자나 이해관계자로부터
불필요한 질문이 쏟아집니다.
그 질문들은 대부분
일을 더 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일을 늦추는 잡음이 됩니다.


그래서 회의록은
설득문이 아니라 결과 목록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시점에 무엇이 결정됐고,
무엇이 남았는지만 남기면 됩니다.


정정이 필요하면
그때 고치면 됩니다.


회의는 바꾸지 않았다, 회의록만 바꿨다


실제로 동일한 회의 스크립트를 두고
기존 방식
속기 방식으로 정리한 회의록을 비교해 봤습니다.


후자가 더 깔끔했습니다.
해석이 덜 필요했고,
다음 액션이 분명했습니다.


회의를 바꾸려 한 것은 아닙니다.
회의 문화를 설교하려 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회의가 끝난 뒤
무엇이 남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하나 세웠을 뿐입니다.


회의는 여전히 길고,
사람들은 여전히 중언부언합니다.


하지만 회의록이 바뀌면
회의는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래서 나는
회의를 바꾸지 않고
속기사처럼 회의록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의 회의록에는, 무엇이 남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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