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6. 교육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지식과 도덕, 그리고 가난의 모순에 대하여

by 김지영
쇼펜하우어의 말 9 : 인간의 인식성장 과정을 추적해 보면… 교육이라는 외부강압은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거의 순간마다 다가오는 위험이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적지 않게 혼란스러웠다.


인간은 먼저 ‘나’를 인식한다.
그리고 그 밖의 것들을 인식한다.
타인도, 사회도, 제도도, 사상도 인식하게 된다.


이 자체는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 사이에
타인의 개입이 들어오는 순간이다.


내가 이해한 쇼펜하우어의 핵심은 이것이다.
인간은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때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이상
사물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는 없다.


법, 질서, 윤리, 정치사상 같은 것들.
이런 사물들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내가 사물을 직접 인식하기 전에
누군가가 그 사물에 대한 해석을 먼저 주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 인식은 성장이라기보다
전달이 된다.


교육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교육은 보통 목적이 있다.
그리고 특정한 다수를 상대로 작동한다.
그래서 효율성효과성을 동시에 추구한다.


하지만 현실의 교육은
효과성보다 비용 효율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내용을
정해진 방식으로
많은 사람에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사물과 직접 마주할 기회를 잃는다.


사물 자체를 인식하기보다
사물에 대한 이미 정리된 판단을 먼저 받는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지식은 도덕과 마찬가지로
외부에서 정한 관습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이 말은 지식과 도덕을 부정하자는 뜻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개인 안에 들어오느냐다.


이해되지 않은 지식,
사유되지 않은 도덕,
내 판단 없이 받아들인 규범.


이런 것들은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정체성의 혼란을 낳을 수 있다.


겉으로는 많이 배운 것 같지만
실은 교육으로 인해 강제 수용된 범위 안에서만
사유하는 인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지점은
니체와도, 장자와도 묘하게 닿아 있다.


니체는 타인의 도덕을 그대로 따르는 인간을 경계했고,
장자는 외물에 휘둘리며 본성을 잃는 인간을 경계했다.


쇼펜하우어도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교육으로 감화된다는 것은
인식과 의식의 통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통일이
내 안에서 다시 사유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건강한 통일이 아니라
표준화된 순응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이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도덕만큼은
관습을 따라도 되지 않을까.


도덕은 법처럼 강제되지는 않지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데 필수적인 덕목 아닌가.


그런데 왜 쇼펜하우어는
도덕과 지식을 한데 묶어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고 말했을까.


아마 이유는 이것일 것이다.


도덕도 지식과 마찬가지로
내면에서 다시 구성되지 않으면
그저 외부 규율에 머문다.


나는 왜 이것을 옳다고 믿는가.
왜 이것을 따라야 하는가.
그 질문이 빠진 도덕은
선한 습관일 수는 있어도
주체적인 윤리는 아닐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말 10 : 교육은 우리를 가난한 신분에서 구원해 줄 수는 있어도 가난이라는 모순을 우리 삶에서 영원히 추방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 문장도 단번에 이해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경제적 의미로 읽혔다.
교육을 받으면
가난한 집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가난’은
그보다 더 깊은 상태를 뜻하는 듯했다.


내가 해석하기에
교육의 수혜자란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이념과 지식 체계를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학습한 사람이다.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배우기 싫어도 강제로 질 좋은 교육을 받았거나
적어도 제약 없이 배움의 기회를 얻은 사람.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은
정말 더 나은 인간이 되었을까.


정말 더 만족스러운 사회를 만들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다.


배운 사람들이
공적인 효능감을 주지 못하는 장면을
우리는 너무 자주 본다.


체제를 잘 이해하고,
규칙을 잘 학습하고,
경쟁을 통과한 사람들이
정작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는 실패하는 장면.


이때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이다.


그들이 받은 교육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면
교육은 가난한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는 있다.
즉, 먹고사는 기술과 기회를 준다.


하지만 진짜 가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가난은
이런 상태다.


먹고사는 것
그 이상을 품지 못하는 상태.


조금 더 밀어붙이면
삶의 방향과 욕망을
스스로 설정하지 못하는 상태.


교육은 직업을 주고
기술을 주고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주체성을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공동체의 유지와 관리에 더 큰 관심을 가지는 교육은
절대다수의 사람을
가난의 모순 속에 계속 머물게 할 수도 있다.


물질적 가난에서는 벗어났지만
정신적 가난, 주체성의 가난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채로.






무지가 더 행복한가


이쯤 되면
조금 위험한 질문 하나가 따라온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가장 행복한 것 아닐까.


나 역시 이 질문을 떠올렸다.


하지만 오래 생각해 보니
무지가 행복한 것은 아닌 듯하다.


무지는 단지
결핍을 자각하지 않은 상태에 가깝다.


행복이라기보다
아직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


쇼펜하우어가 말하고 싶은 것도
무지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일지 모른다.


교육 이후에도 가난하지 않기 위해
교육을 다시 의심하라고.


지식과 도덕을 거부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내 안에서 다시 사유하고
다시 구성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배웠지만 빈곤한 인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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