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허무를 통과해야 타인과 제대로 만날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말 11 : 인간과의 교제는 극도의 주의가 필요한 매우 힘든 수행이다. 항상 그들의 연약한 마음을 신경 써야 하고, 표정도 수시로 살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사람과의 교제를
자연스러운 친화 행위라기보다
상당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수행으로 본다.
나도 이 말에 꽤 공감한다.
예전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타인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이
하루에 얼마나 되느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총량이 높다.
그래서 사람을 많이 만나고,
사교 모임이나 관계 활동도 활발하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하루에 단 몇 분 정도만
타인에게 자신의 시간을 내어준다.
나는 어느 쪽일까.
생각해 보면
나는 사람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다.
주어진 상황이라면 기꺼이 감수한다.
내가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일이거나,
반강제적으로라도 참여해야 하는 상황이면
오히려 잘 해내는 편이다.
교제에 필요한 요령도 어느 정도 안다.
그래서 사람을 편하게 만든다는 피드백도 종종 받는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관계를 넓히는 일에는
예전보다 훨씬 신중해졌다.
대학생 시절에는
사람 사귀는 일이 즐거웠다.
그러나 사회에 진출하고 나서는
누구와 얼마나 깊이 교제할지
훨씬 가려가며 시간을 쓴다.
특히 깊이 있게 사귈 생각이 아니라면
연락처를 쉽게 주고받지 않는다.
그건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나의 에너지를 어디에 쓸 것인가가
이제는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혼자 사색하고,
사유하고,
고민하는 시간.
그 시간이 내게는
더 생산적이고 더 즐겁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가장 많이 사람을 만나는 공간은
주일의 교회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도
각자 목적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그런 사람들과의 교제는
생각보다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
동시에 나는
앞으로 다른 교제도 확장해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AI 사용법을 익히기 위한 커뮤니티,
오프라인 모임,
그리고 자동차부품과 모빌리티 분야에서
내 전문성과 시야를 넓혀줄 사람들.
이제는 좁은 범위 안에서의 역할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회사 밖 세계를 더 많이 접하고, 경험하고,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사람과의 교제에는 늘 수고로움이 따른다.
나는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 조심스럽다.
이 조심스러움은
소심함도 아니고 회피도 아니다.
인간관계의 비용을
정확히 인식한 결과에 가깝다.
쇼펜하우어의 말 12 : 생의 허무를 모르는 인간은…
그는 스스로에게 영구적 타인으로 남는다.
이 문장은 또 다른 방향에서 나를 붙잡았다.
쇼펜하우어는 허무와 고독을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
기쁨과 환희보다는
허무와 고독, 그리고 고통에 더 가깝게 본다.
처음에는 이 말이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생이 늘 화창한 날씨일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1년 365일을 떠올려봐도
맑고 쨍한 날은 100일도 채 안된다.
흐린 날이 더 많고,
어떤 나라는 비 오는 날이 대부분이다.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늘 밝고 좋은 날만 있을 것이라고 믿는 쪽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내가 보기에
허무는 공허와 비슷하다.
겉은 빵빵한데 속은 빈 공갈빵처럼.
먹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막상 베어 물면 속이 비어 있다.
삶도 종종 그렇다.
이럴 줄 알았는데 저렇고,
막상 해보니 별것 아니고,
큰 기대를 품었는데
결과는 속 빈 강정 같을 때가 있다.
그때 인간은 허무를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허무를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한다.
명예,
이름,
성과,
후대의 기억.
이름이라도 남기고 싶어 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허무를 느끼는 것 자체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허무를 모르는 삶이 더 위험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먹이’라는 표현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먹이는 꼭 자본주의의 노동 대가나
경제 논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교육일 수도 있다.
읽기만 하고 사유하지 않는 독서일 수도 있다.
타인의 욕망일 수도 있다.
쉽게 접할 수 있고,
불편함을 수반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나를 안주하게 만드는 모든 것.
그것이 쇼펜하우어가 말한 '먹이'일 가능성이 크다.
그 먹이가 주기적으로 지급될수록
인간은 허무와 고독을 느끼지 않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스스로에게 영구적 타인으로 남는다.
고독도 마찬가지다.
나는 고독을 외로움과는 다르게 본다.
외로움은 사람의 부재에서 오지만,
고독은 오히려 철저히 혼자 사유할 때 온다.
그 생각은 내 것이기에
완전히 공유될 수 없다.
전달될 수도 없고,
대신 느껴질 수도 없다.
그래서 고독은 지독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고독은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
고독하지 않다는 것은
나의 생각으로 점철된 삶이 아니라는 뜻일 수도 있다.
계속해서 주어지는 먹이,
계속해서 소비되는 안정,
계속해서 반복되는 익숙함만 따라간다면
나는 끝내 나 자신에게도 타인으로 남을 것이다.
사람과의 교제는 비용이 든다.
고독은 불편하다.
허무는 결코 유쾌한 감정이 아니다.
그런데도 쇼펜하우어를 읽고 나면
이 셋을 피해야 할 것으로만 볼 수 없게 된다.
관계를 감당하려면
먼저 고독을 견뎌야 한다.
타인과 제대로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과 혼자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허무를 느끼지 않는 삶은
편안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편안함이
나를 점점 나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면
그건 평안이 아니라 길들여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런 질문이 남는다.
나는 지금
먹이를 소비하며
나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가.